본문 바로가기

BOOKMARK/literature

플로베르의 앵무새/줄리언 반스

 저자가 작품 속에 부재해야 한다는 플로베르의 주장은 아주 철저하다. 몇몇의 작가들은 외관상 이 원리에 동의하고 있지만, 그들은 뒷문으로 슬그머니 들어와 대단히 개인적인 문체로 독자를 곤봉으로 두들겨 패듯 때려눕힌다. 이러한 살인은 완벽하게 수행되나 범죄 현장에 남은 야구 방망이에는 지문이 강하게 남아 있다. 플로베르는 달랐다. 그는 문체를 믿었다. 어느 누구보다 그랬다. 그는 아름다움과 음향과 정황학, 그리고 완벽함을 달성하려고 끈질기게 노력했다. 그러나 와일드와 같은 작가들이 취한 도안식 완벽함을 위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문체는 주제가 끌고 온다. 문체가 주제에 얹히는 것이 아니라, 주제에서 발생한다. 문체는 사고의 정확한 반영이다. 정확한 단어, 분명한 어구, 완전한 문장은 항상 <저쪽> 어딘가에 있다. 작가의 임무는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사용하여 그것을 찾는 일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것이 슈퍼마켓에 가서 철제 바구니를 가득 채우는 일에 지나지 않는 것일 수도 있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희랍의 평원이나, 어두움, 눈 속, 빗속에서 길을 잃었다가, 개를 흉내 내어 짖는 따위의 희귀한 방법으로, 찾고자 하는 길을 발견하는 것과 같은 일이 될 수도 있다.
 실용과 지식을 중시하는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이런 야심은 다소 촌스러운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투르게네프는 플로베르를 순진하다고 했다). 우리는 이제 언어와 실재가 딱 일치한다고 믿지 않는다. 사실상 우리는 사물이 언어를 낳듯이 언어가 사물을 낳는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플로베르를 순박하다거나 ─더욱 있을 법하지만─ 실패한 사람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의 진지함이나 단호한 고독을 높이 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19세기는 결국 발자크와 위고의 시대였다. 한쪽 끝에는 난초같이 화사한 낭만주의가, 다른 쪽 끝에는 격언적인 상징주의가 있었다. 쫑알대는 개성과 쇳소리를 내고 있는 문체의 세기에 플로베르가 주장했던 작품에서 작가의 불가지성은 두 가지 중 하나로 특징지을 수 있다. 고전적이냐, 아니면 현대적이냐 하는 것이다. 17세기를 뒤돌아보거나, 20세기 후반을 내다볼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소설과 희곡과 시를 텍스트로 거창하게 다시 분류하는─저자를 단두대로 보내는─현대의 비평가들은 플로베르를 가볍게 넘어가서는 안 된다. 플로베르는 한 세기 앞서서 텍스트를 준비하고 자신이 가진 개성의 중요성을 부인한 작가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작품에서 저자는 우주에 존재하는 신처럼 모든 곳에 존재하면서 어느 곳에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 물론 이 말은 20세기 들어 매우 심한 오해를 받았다. 사르트르와 카뮈를 보라. 신은 죽었다고 그들은 말한다. 그래서 신과 같은 소설가도 죽었다고 한다. 전지전능이란 불가능하고, 인간의 지식이란 불완전하니, 소설 그 자체도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그 말은 빛나는 말로 들릴 뿐만 아니라 또한 논리적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따지고 보면 소설은 신에 대한 믿음이 일어났을 때 발생한 것이 아니었다. 또한 그 문제라면 전지적 화자를 가장 굳게 믿었던 소설가와 전지적인 창조자를 가장 굳게 믿었던 소설가 사이에는 상관성이 별로 없다. 플로베르와 조지 엘리엇을 비교해 보라.
 좀 더 핵심으로 들어가 이야기하자. 19세기 소설가의 신성 전제는 단지 기술적 방안이었고, 현대 소설가의 국부성 역시 하나의 기법이다. 현대의 화자가 머뭇거리고, 불확실성을 주장하며, 오해하고, 계략을 꾸미고, 과오를 범할 때, 현대의 독자는 그러한 화자를 보고 그 소설이 더욱 사실적이고 진지하게 표현되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는가? 작가가 소설 속에서 두 개의 다른 결론을 제시할 때(어째서 두 개인가? 왜 백 개의 다른 결론이면 안 되는가?) 독자는 자신이 둘 중 하나를 결정할 수 있는 <선택의 기회를 받았다>고 생각하고 그 경우 그 작품은 삶의 여러 가지 가능성을 반영하고 있다고 진지하게 생각할까? 독자는 두 개의 결론을 모두 소비해야 하기 때문에, 그런 <선택>은 결코 진실한 선택이 아니다. 실생활에서 우리가 결정을 하면─또는 결정이 우리를 만들면─우리는 한 가지 길로 가야 한다. 우리가 다른 결정을 내렸다면(언젠가 나는 아내에게 다른 결정에 대하여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녀가 나의 의중을 이해하려는 자세였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우리는 다른 곳에 도달했을 것이다. 두 개의 결말을 가진 소설은 이런 현실을 재현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우리를 두 개로 갈라진 길까지만 인도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입체주의 형식이다. 그것은 무방하다. 그러나 그 속에 내포된 술수에 속아 넘어가지는 말자.
 결국 소설가들이 삶의 가능성들이 서로 만나는 삼각주 같은 세계를 진실로 재현하기 원한다면, 그들은 다음과 같은 것을 할 수 있다. 책의 뒤쪽에 여러 색깔로 봉인된 봉투들을 마련해서 독자가 그 중 하나를 택해 뜯어 보게 하는 것이다. 각각의 봉투에는 겉면에 다음과 같은 분명한 표시를 한다. 전통적인 행복한 결말, 전통적인 불행한 결말, 전통적인 이도 저도 아닌 결말, 신의 초자연적 힘에 의한 참말 같지 않은 결말, 모더니스트의 자의적인 결말, 이 세상의 종말로 끝나는 결말, 클리프행어같은 결말, 꿈 같은 결말, 불투명한 결말, 초현실주의적 결말 등등. 당신은 단지 한 가지를 택하고, 선택하지 않은 봉투들은 없애 버려야 할 것이다. 독자에게 결말의 선택을 맡긴다는 내 말은 바로 이러한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내가 터무니없이 산문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결말을 내지 않는 화자? 당신은 이미 그런 화자를 만난 것입니다. 바로 내가 그런 화자입니다. 아마 내가 영국인이기 때문에 그럴 겁니다. 내가 영국인일 거라고 짐작은 했겠죠? 나는…… 나는…… 저 위쪽의 갈매기를 보세요. 나는 지금까지 갈매기를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갈매기들은 미끄러지듯 날아다니면서 샌드위치 속의 연골을 기다립니다. 보세요, 무례하다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갑판에 나가 산책을 해야겠어요. 이 바 안은 숨이 막힐 듯합니다. 대신 돌아가는 길에 다시 만나는 게 어떻습니까? 목요일 두시, 페리 호라고요? 나도 꼭 그 배를 타겠습니다.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뭐라고요? 안된다고요. 나와 함께 갑판에 갈 수 없다고요. 애석하군요. 그렇지만 나는 우선 화장실에 가려 했습니다. 당신이 그곳까지 따라와서 옆 칸에서 볼일 보는 것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습니다.
 사과드립니다.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습니다. 배가 출항하면 바에서 두시에 만나는 것은 어떻습니까? 오! 마지막으로 한마디 하고 싶습니다. 그랑드 거리의 치즈 가게를 기억하십시오. 르루라는 이름의 가게였습니다. 그곳에서 브리야-사바랭 치즈를 사보십시오. 만일 당신이 그것을 사가지고 가지 않으면, 영국에서는 그렇게 훌륭한 치즈를 맛보지 못할 겁니다. 영국산 치즈들은 지나치게 차갑게 보관되거나 아니면 숙성되는 것을 늦추기 위해 첨가물을 집어넣습니다. 이 이야기야, 당신이 치즈를 좋아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