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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MARK/literature

커튼/밀란 쿤데라

반현대적인 모더니즘

 "현대적이어야 한다."라고 아르튀르 랭보는 썼다. 약 60년 후에 곰브로비치는 정말로 그래야 하는지 확신하지 못했다.『페르디두르케』에서 르죈 집안은 '현대적인 중학생' 딸이 골칫거리였다. 그녀는 전화통을 붙들고 있고, 고전 작가들을 무시하며, 방문한 손님을 "쳐다보기만 하고, 오른손에 들고 있던 드라이버를 이빨 사이에 물고는 아주 버릇없게 손님에게 왼손을 내민다."
 그의 엄마도 현대적이다. 그녀는 "신생아 보호 위원회" 회원이며, 사형 제도 폐지와 풍속의 자유를 위해 싸운다. "고집스럽게 그리고 버릇없게 화장실로 가서 마치 거기에 들어가지 않았떤 것처럼 하면서 나온다." 나이가 들어 감에 따라 현대성은 그녀에게 유일한 '젊음의 대체물'로서 꼭 필요하다.
 그리고 아빠는? 그 또한 현대적이다. 그는 아무 생각도 없지만 딸과 아내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한다.
 곰브로비치는『페르디두르케』에서 20세기에 일어난 근본적인 전환을 포착했다. 그때까지 인류는 두 가지 부류, 즉 현상을 유지하려는 자와 그것을 바꾸려는 자로 양분되었다. 그런데 역사의 가속화는 그 중대한 결과들을 가져다주었다. 예전에는 매우 천천히 바뀌는 사회의 동일한 환경 속에서 살았지만, 갑자기 굴러가는 양탄자처럼 역사가 발밑에서 움직이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 온 것이다. 현상이 움직이게 된 것이다! 갑자기 현상과 일치함은 움직이는 역사와 일치함과 같은 것이 되었다. 결국 사람들은 진보적이면서도 순응적이며, 보수적이면서도 반항적일 수 있게 되었다!
 사르트르와 동시대인들에게 보수적이라고 공격받은 카뮈는 "역사 쪽으로 의자를 놓은" 사람들에게 유명한 재치 있는 응답으로 응수했다. 카뮈는 정확하게 보았지만 이 소중한 의자에 바퀴가 달렸으며 언제부터인가 모든 사람, 즉 사형 제도 폐지를 위한 투쟁자나 신생아 보호 위원회의 모든 위원은 물론이고 현대적인 여중생들, 그 엄마들, 아빠들까지도 이 의자를 앞으로 밀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뿐이다. 여기에는 물론 현대적이라는 것을 기뻐하는 자만이 정말로 현대적이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 그들 뒤에 달려오는 대중을 향해 웃는 얼굴을 돌리면서 달리는 모든 정치인도 포함되어 있다.
 바로 그때 랭보의 후계자 가운데 일부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오늘날 모더니즘이라는 이름에 합당한 유일한 모더니즘은 반현대적 모더니즘이다.


구성

 망각이 장악하는 광대한 시간 속을 이야기는 결국 용해되고 마는 광활한 공간의 세계, 톨스토이는 그런 세계에다 안나의 이야기를 위치시킴으로써 소설이라는 예술의 본질적 성향을 따랐다. 실제로 태고 때부터 존재해 오던 모습 그대로인 서술은, 작가가 더 이상 단순한 '스토리'에 만족하지 못하고 주위에 펼쳐진 세계로 난 아주 커다란 창들을 활짝 열어젖힐 때 비로소 소설이 되었다. 이렇게 '스토리들' 중 한 '스토리'에 에피소드, 묘사, 관찰, 성찰 들이 덧붙여진다. 작가는 아주 복잡하고 정말 이질적인 소재와 대면하여, 건축가처럼 그 소재에 형식을 입히는 데 몰두했다. 이처럼 소설 기법에 있어서, 그 기법에 생긴 이래부터 계속, 구성(건축술)은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이와 같이 구성이 차지하는 예외적 비중은 소설이라는 예술의 발생론적 표지 중 하나다. 구성은 소설을 다른 문학 예술, 즉 희곡(희곡 건축술의 자유는 상연 시간과 쉼 없이 관객의 주의를 사로잡아야 할 필요에 의해 제한된다.), 또 시와 구별되게 만들어 준다. 시에 있어서, 보들레르, 그러니까 천하의 보들레르가 전후의 무수한 시인과 똑같은 소네트 형식을 사용할 수 있었다는 것이 정말 놀랍지 않은가? 그러나 바로 그러한 것이 시의 기법이다. 시의 독창성은 상상력에 의해 발현되지 전체의 건축술에 의해 드러나는 것이 아니니까. 반대로 소설의 아름다움은 그 소설의 건축술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내가 방금 아름다운이라고 했는데, 왜냐하면 구성은 단순한 기술적 기량이 아니기 때문이다. 구성은 그 자체로 한 작가가 표방하는 스타일의 독창성을 보여준다.(도스토예프스키의 모든 소설은 동일한 구성 원리에 기초한다.)그리고 구성은 각각의 독특한 소설을 하나로 묶어 주기도 한다.(동일한 원리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각각은 모방할 수 없는 건축술로 이뤄져 있다.) 구성의 비중은 어쩌면 20세기에 나온 훌륭한 소설들에서 더 부각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다양한 스파일의 폭을 지닌 '율리시스', 소설의 줄거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두 번에 걸쳐 삽입된 우스갯소리로 인해 세 부로 나뉜 '악당'이야기 '페르디두르케', 각기 다른 다섯 개의 '장르들'(장편소설,중단편소설,르포르타주,시,에세이)을 단 하나의 전체로 통합한, '몽유병자들'의 세번 째 책, 서로 어울리지 않는 완전히 독자적인 두 이야기로 구성된 포크너의 '야자수' 등등.
 어느 날 소설의 역사가 끝이 난다면 끝난 이후에도 남아 있을 위대한 소설들은 어떤 운명을 맞이하게 될까? 어떤 소설들('팡타그뤼엘'. '트리스트럼 샌디', '운명론자 자크', 율리시스'와 같은 소설들)은 줄거리를 말하는 게 불가능하고, 또 그런 이유로 각색도 안 된다. 이 소설들은 있는 그대로 살아남거나 아니면 사라져 버릴 것이다. 다른 소설들 (안나 카레니나, 백치, 소송과같은 소설들)은 품고 있는 '스토리' 덕택에 줄거리를 말할 수 있는 듯이 보이므로 영화, 텔레비전 드라마, 연극, 만화로 각색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불멸'은 한낱 공상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한 소설을 연극이나 영화로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그 소설의 구성을 해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면 단순한 '스토리'만 남게 된다. 형식은 포기하고 말이다. 아니, 예술 작품에서 형식을 제하고 나면 무엇이 남는단 말인가? 사람들은 각색을 통해서 위대한 소설의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화려한 무덤만 만들 뿐이다. 그 무덤의 대리석 묘비의 짧은 글귀만이 존재하지 않는 이의 이름을 생각나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