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장 뤽 고다르 작
제작자의 역할을 맡기는 데에 미국인만 한 것은 없었던가 보다. 미국의 예술 애호가(?)란 단 한 단어면 족하다. 경멸. 짧은 거리를 가는데에도 꼭 자동차를 타야 하고 영화에 여자의 나체가 나오면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른다. '예술이지만, 관객들이 저걸 이해하겠어요?' 시시덕거리는 표정이나 지우고 이야기했으면 약간의 설득력을 가질 수도 있었을 지도 모른다. 어찌 됐든 돈은 넘쳐나니 그에 따른 품위 유지비를 위해 자칭 예술 애호가의 역할을 맡는다. 처음 만나는 사람의 앞에서 그리스 비극 배우를 흉내 내며 연극하듯 이야기를 하고(그만의 무대 아래서 번역을 해주는 여자의 말은 비극 무대에서 '코러스'의 역할을 하듯, 제작자의 말과 의미는 같되 조금 변형시키며 대사를 읊는다.) 무슨 말을 할 때마다 유명한 문구를 인용하기를 즐긴다. 자신의 말은 전혀 하지를 못하는 것 같다. 아마 제작자의 두뇌 속 언어는 은행과 관련된 업무 이외에는 활용되지를 못할 테니 어쩔 수 없겠다. 이 제작자는 프리츠 랑의 영화에 투자 중인데 그의 예술에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대본과 전혀 다른 영상이 나왔다며 분개한다. 프리츠 랑이 만드는 영화는 역시 그리스 비극에 관한 이야기다. 여기서 제작자와 프리츠 랑은 페넬로페에 관한 입장에 대립하는 의견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또한 예술과 자본에 대한 영화 전체의 메타포다. 폴은 처음엔 자본을 따라 제작자와 의견을 같이 하지만, 후에 브리짓 바르도의 '경멸'의 이유를 깨닫고는 다시 입장을 선회한다.
'그리고 신은 여자를 창조했다'에서 남자를 유혹하기 위해 나체로 햇볕을 쬐고 있던 브리짓 바르도는 이제 결정의 갈림길에 서 있다. 폴은 아직도 그녀에게 선택해줄 것을 종용한다. 제작자의 구미에 맞춰 시나리오를 쓴다면, 그건 오로지 당신을 위한 일이다. 그 돈으로 아파트와 관련된 비용을 낼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당신이 계속 나를 경멸한다면 난 절대 시나리오를 쓰지 않겠다고. 폴은 멍청하게도 계속해서 경멸받을 짓만 하는 것이다. 아직도 부인의 탓만 하며 힘들고 어려운 선택을 그녀에게 밀어내기만 한다. 그녀의 경멸은 극에 달한다. 그래서 '시나리오를 쓰라'고 한다. 계속해서 자본에 반항해오며 남편도 그러기를 원했던 부인이 끝내는 남편의 예술가로서의 자존심을 포기한 것이다. 웃기게도 예술가 본인이 아닌, 그의 부인이 예술의 자존심을 끝까지 움켜쥐고 있다 놔버린 것이다. '당신은 남자도 아니'라는 그녀의 말이 이해되는 순간이다. 그녀는 이제 현실로 돌아가 타이피스트를 그만둔 자신의 처지와 아파트 값을 걱정한다. 현실로 돌아왔을 때 어느 날 '폴의 여자가 되어 있었'던 브리짓 바르도는 사랑의 환상에서 깨어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로 도망간다. 자본으로 뛰어든 것이다. 그리곤, 죽는다. 사실 그녀야말로 예술의 세계를 벗어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결국 뒤에 남게 된 폴은 로마로 다시 희곡을 마치기 위해 떠난다. 폴이 예술의 고향으로 떠나자, 프리츠 랑의 율리시스는 자신의 고향을 바라본다.
어느 날 스펜서 트레이시가 이 개념에 대해 아이러니컬하게도 다음과 같이 간단명료하게 공식을 제시했는데, 그것은 선천적인 자질을 갖춘 모든 배우들에게 적합한 것이었다.―"유일한 매소드는 바로 이거야. 자신이 연기하는 텍스트를 알고 있을 것, 그리고 가구들이나 다른 배우들과 부딪치는 것을 피할 것."―이 공식은 존 웨인과 로버트 미첨에 의해서도 여러 번 인용됐고, '액터스 스튜디오'식 매소드가 확립될 때까지 배우들의 좌우명에 되었다. 고전 영화에 대한 일종의 시극이라 할 수 있는 <경멸>에 (이 작품은 개선 시극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장송 시극에 해당한다), 장 뤽 고다르는 브리지트 바르도를 출연시킨다. 그리고 고다르는 그녀가 "완벽한 식물성의 자연스러움으로" 연기했다는 믿기 어려운 찬사를 보낸다. 그러나 '나무와 유사한' 자연스러움의 가치에 다한 이 마지막 평가는 고전주의의 종말에 대한 마지막 인사라 할 수 있다.
<영화 속의 얼굴, 자크 오몽>
★★★★
제작자의 역할을 맡기는 데에 미국인만 한 것은 없었던가 보다. 미국의 예술 애호가(?)란 단 한 단어면 족하다. 경멸. 짧은 거리를 가는데에도 꼭 자동차를 타야 하고 영화에 여자의 나체가 나오면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른다. '예술이지만, 관객들이 저걸 이해하겠어요?' 시시덕거리는 표정이나 지우고 이야기했으면 약간의 설득력을 가질 수도 있었을 지도 모른다. 어찌 됐든 돈은 넘쳐나니 그에 따른 품위 유지비를 위해 자칭 예술 애호가의 역할을 맡는다. 처음 만나는 사람의 앞에서 그리스 비극 배우를 흉내 내며 연극하듯 이야기를 하고(그만의 무대 아래서 번역을 해주는 여자의 말은 비극 무대에서 '코러스'의 역할을 하듯, 제작자의 말과 의미는 같되 조금 변형시키며 대사를 읊는다.) 무슨 말을 할 때마다 유명한 문구를 인용하기를 즐긴다. 자신의 말은 전혀 하지를 못하는 것 같다. 아마 제작자의 두뇌 속 언어는 은행과 관련된 업무 이외에는 활용되지를 못할 테니 어쩔 수 없겠다. 이 제작자는 프리츠 랑의 영화에 투자 중인데 그의 예술에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대본과 전혀 다른 영상이 나왔다며 분개한다. 프리츠 랑이 만드는 영화는 역시 그리스 비극에 관한 이야기다. 여기서 제작자와 프리츠 랑은 페넬로페에 관한 입장에 대립하는 의견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또한 예술과 자본에 대한 영화 전체의 메타포다. 폴은 처음엔 자본을 따라 제작자와 의견을 같이 하지만, 후에 브리짓 바르도의 '경멸'의 이유를 깨닫고는 다시 입장을 선회한다.
'그리고 신은 여자를 창조했다'에서 남자를 유혹하기 위해 나체로 햇볕을 쬐고 있던 브리짓 바르도는 이제 결정의 갈림길에 서 있다. 폴은 아직도 그녀에게 선택해줄 것을 종용한다. 제작자의 구미에 맞춰 시나리오를 쓴다면, 그건 오로지 당신을 위한 일이다. 그 돈으로 아파트와 관련된 비용을 낼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당신이 계속 나를 경멸한다면 난 절대 시나리오를 쓰지 않겠다고. 폴은 멍청하게도 계속해서 경멸받을 짓만 하는 것이다. 아직도 부인의 탓만 하며 힘들고 어려운 선택을 그녀에게 밀어내기만 한다. 그녀의 경멸은 극에 달한다. 그래서 '시나리오를 쓰라'고 한다. 계속해서 자본에 반항해오며 남편도 그러기를 원했던 부인이 끝내는 남편의 예술가로서의 자존심을 포기한 것이다. 웃기게도 예술가 본인이 아닌, 그의 부인이 예술의 자존심을 끝까지 움켜쥐고 있다 놔버린 것이다. '당신은 남자도 아니'라는 그녀의 말이 이해되는 순간이다. 그녀는 이제 현실로 돌아가 타이피스트를 그만둔 자신의 처지와 아파트 값을 걱정한다. 현실로 돌아왔을 때 어느 날 '폴의 여자가 되어 있었'던 브리짓 바르도는 사랑의 환상에서 깨어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로 도망간다. 자본으로 뛰어든 것이다. 그리곤, 죽는다. 사실 그녀야말로 예술의 세계를 벗어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결국 뒤에 남게 된 폴은 로마로 다시 희곡을 마치기 위해 떠난다. 폴이 예술의 고향으로 떠나자, 프리츠 랑의 율리시스는 자신의 고향을 바라본다.
<영화 속의 얼굴, 자크 오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