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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MARK/humanities

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프리드리히 니체

 그 자체로 분리된 아폴론의 예술적 힘과 디오니소스의 힘이 서로 나란히 활동하게 되면 어떤 미학적 효과가 발생할까? 좀더 간단히 말해, 음악은 그림과 개념에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이에 관해선 쇼펜하우어가 가장 상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리하르트 바그너도 이 문제에서 그가 더할 나위 없이 명료하고 투명한 서술을 했다고 칭찬한 바 있다. 그가 서술한 부분 전체를 나는 여기서 인용할 것이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 1권, 309쪽. "이 모든 것에 따라 우리는 현상 세계, 또는 자연이나 음악을 동일한 사물의 서로 상이한 두 표현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사물 자체가 둘의 유사점을 유일하게 매개하는 것이고, 유사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매개체를 인식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에 따르면 음악은, 세계의 표현으로 간주될 경우, 최고로 보편적인 언어다. 심지어 이 언어는 개념의 보편성에 대해서도, 개별적인 사물에 대한 관계와 동일한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음악의 보편성은 추상의 공허한 보편성이 아니라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며 일반적이고 명확한 내용과 결부되어 잇다. 이런 점에서 음악은 기하학적 도형이나 숫자와 비슷하다. 즉 모든 가능한 경험 대상의 보편적인 형식으로서 모든 것에 선험적으로 적용 가능하지만,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다. 가능한 모든 노력, 흥분과 의지의 표출, 즉 이성이 부정적이고 광범위한 개념인 감정으로 치부하는 인간 내면의 모든 과정이 무수히 가능한 선율 속에 표현된다. 그러나 소재 없이 항상 단순한 형식의 보편성 속에서 표현되며, 마치 육체 없이 육체의 가장 내적인 영혼을 따르듯이 현상을 따르지 않고 언제나 물 자체를 따른다. 음악이 모든 사물의 진정한 본질과 맺는 이 친밀한 관계로부터 다음 현상이 설명될 수 있다. 즉 어떤 장면, 줄거리, 사건, 환경에 적절한 음악이 흐르면, 음악은 그것의 가장 은밀한 의미를 해명해주는 것 같고 그에 대해 가장 정확하고 분명한 주석을 아려주는 듯한 까닭이 설명된다. 이는 어떤 교향곡이 주는 인상에 완전히 몰두한 사람이 음악을 들으면서 마치 삶과 세계의 모든 가능한 과정이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는 경우와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다시 정신을 차리면 그는 자기 눈앞에서 떠다니던 사물들과 저 음악 사이에 어떤 유사성도 진술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미 말했듯이 음악은 현상의 모사가 아니라,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의지의 적절한 대상의 모사가 아니라 의지 자체의 직접적인 모사이며, 세상의 물질적인 모든 것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것, 모든 현상에 대해 물 자체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다른 예술과 구분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을 구체화된 음악이라 불러도 되고 구체화된 의지라 불러도 될 것이다. 그러므로 왜 음악이 모든 형상, 즉 실질적 삶과 세상의 장면이 좀더 높은 의미를 가지고 나타나도록 만드는지 그 이유가 분명해진다. 물론 선율이 주어진 현상의 내적 정신과 유사하면 할수록 그 의미는 그만큼 더 명료해진다. 바로 이런 사실에 근거해서 우리는 시를 노래로서, 구체적인 묘사를 무언극으로서 또는 이 둘을 오페라로서 음악에 종속시킬 수 있다. 음악의 보편적인 언어에 종속된 인간의 삶의 모습들이 필연적으로 음악에 연결되어 있거나 음악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이 모습들과 음악의 관계는 보편적인 개념들과 임의의 사례들과의 관계와 같다. 그 모습들은 음악이 단순한 형식의 보편성 속에서 표현하는 것을 현실의 명확성 속에서 묘사한다. 선율은 어떤 의미에서는 보편적 개념처럼 현실의 추상화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현실은, 즉 개별적인 사물의 세계는 개념의 보편성과 선율의 보편성에,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것, 특수하고 개인적인 것, 개별 사건을 제공해준다. 그러나 개념과 선율의 두 보편성은 어떤 측면에서는 서로 대립된다. 개념들은 관조로부터 추상화된 형식, 즉 사물에서 벗겨낸 겉껍질만을 가지고 잇어서 추상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에 반해 음악은 모든 형체들에 앞서 존재하는 가장 내밀한 핵심, 사물의 심장을 제공한다. 이런 관계는 스콜라 학파의 언어로 잘 표현될 수 있다. 즉 개념들은 사물 이후의 보편이지만 음악은 사물 이전의 보편이고 현실은 사물 속의 보편이다.



반시대적 고찰Ⅱ
 그러나 삶이 역사의 봉사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은 나중에 증명하게 될 명제, ―'역사의 과잉은 살아 있는 것에 해를 끼친다'라는 명제만큼 명확하게 이해되어야 한다. 세 가지 측면에서 역사는 살아있는 것에 속한다. 역사는 행동하고 추구하는 자로서, 보존하고 존경하는 자로서, 고통 받고 해방을 요구하는 자로서 살아 있는 것에 속한다. 이런 세 가지 관계는 세 가지 역사의 종류와 일치한다. 구별이 허용된다면, 역사의 기념비적 방식, 골동품적 방식, 비판적 방식을 구별할 수 있다.
 무엇보다 역사는 행동하고 권력을 가진 자에게 속한다. 그들은 거대한 투쟁을 벌이며, 모범이 되는 사람, 선생과 위로해줄 자를 필요로 하지만, 자기 동료들 중에서는 그리고 현재에는 그들을 찾을 수 없다. 그래서 역사는 실러 같은 사람에게 속한다. 왜냐하면 괴테가 말했듯이 우리의 시대는 너무나 추악하여, 시인은 자신을 둘러싼 인간 생활에서 어떤 쓸 만한 피조물도 만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역사의 의미를 인식하는 법을 배운 사람은 호기심 많은 여행자나 꼼꼼한 연구자가 거대한 과거의 피라미드를 기어오르는 모습을 보면 불쾌감을 느낄 것이다. 그는 모방하고 개선하고 싶다는 자극을 받는 곳에서 오락과 센세이션을 찾아 화랑에 쌓여 있는 그림들 사이를 배회하는 듯한 게으름뱅이를 만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행동하는 자는 허약하고 절망적인 게으름뱅이들 가운데에서, 겉으로만 활동할 뿐 실제로는 그저 흥분하여 버둥거리는 동류들 사이에서 절망하거나 구토를 느끼지 않기 위해 뒤를 돌아보고 한번 숨을 쉬기 위해 목표를 향한 걸음을 잠시 중단한다. 그의 목표는 행복이지만, 아마 그 자신의 행복이 아니라 한 민족이나 인류 전체의 행복일 것이다. 그는 체념으로부터 도피하고, 체념에 대항하는 수단으로 역사를 필요로 한다. 명성이 아니라면 어떤 보수의 가능성도 그에게 보이지 않는다. 다시 말해 역사의 사원 안에서 명예로운 자리를 얻을 가능성이 많은데, 여기에서 그는 후세에게 다시 선생이 될 수 있고 위로를 주는 자, 경고하는 자가 될 수 있다. 그의 훈계는 다음과 같이 때문이다. 과거에 "인간"이라는 개념을 더욱 확대하고 더 아름답게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던 것은 이런 일을 영원히 하기 위해 영원히 존재해야만 한다. 위대한 순간들이 개앤의 투쟁 속에서 하나의 사슬을 형성하고, 인류의 산맥이 수천 년을 이어 이 순간들 속에서 결합하며, 이미 오래전에 지나간 순간들 중 최고의 것이 내게는 아직 생생하고 밝고 위대하다는 것­ ― 이것이 기념비적 역사의 요구 속에 표현된 인간성에 대한 믿음의 근본 사상이다.
(…)
 한 민족의 감각이 그런 식으로 굳어지고, 과거의 삶의 역사가 지속적인 생존과 좀더 고차원적인 삶을 파괴하는 방식으로 삶에 봉사한다면, 역사적 감각이 삶을 보존하지 않고 미라로 만든다면, 나무는 부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위에서 서서히 뿌리 쪽으로 말라 들어가서 ― 결국 뿌리 자체가 죽는다. 골동품적 역사는 현재의 신선한 삶이 그것에 혼을 불어넣지 않고 감동을 주지 않는 그 순간 퇴화해버린다.


 지금 이해되고 있는 "고양인", 즉 이제까지의 성과물이 얼마나 무분별하게 모든 차후 교육의 필연적이고 이성적인 토대로 전제되고 있는지 인식하고는 불쾌하고 놀라운 마음이 들 것이다. 저 단조로운 규약은 대략 이렇다. 젊은이는 교양에 대한 지식으로 시작해야지, 삶에 대한 지식은 물론 삶과 체험 자체로 시작해서는 안 된다. 게다가 교양에 관한 이 지식, 즉 역사적 지식은 젊은이에게 주입되거나 젊은이를 휘젓는다. 다시 말해 그의 머리는 엄청난 수의 개념들로 가득 차는데, 이 개념들은 삶을 직접적으로 관찰해서 얻어진 것이 아니라 과거의 시대와 민족들에 대한 극히 간접적인 지식에서 추출된 것들이다. 스스로 체험하고 자신의 체험들이 서로 연관되어 극히 생동적인 체계가 자신의 내면에서 자라나는 것을 느끼고 싶어 하는 그의 욕망 ― 그런 욕망은 마비되어 마치 술에 취한 것처럼 되고 만다. 다시 말해 옛 시대의 그리고 그 중에서도 바로 가장 위대한 시대의 가장 고귀하고 기이한 경험들을 자신의 내면에 축적하는 일이 마치 몇년 안에 가능한 것처럼 풍부한 허구로 기만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젊은 조각가들을 장인의 작업장, 특히 유일한 장인인 자연의 유일한 작업장으로 데리고 가는 대신 미술관이나 화랑으로 데리고 가는 것과 아주 똑같은 어처구니없는 방법인 것이다. 그래, 마치 사람들이 역사 속에서 잠시 산책하는 사람으로서 과거로부터 요령과 기술, 진정한 삶의 수확을 알아낼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그래, 삶에서 무능력자와 수다쟁이가 기어 나오지 않게 하려면, 살 맞체는 철저하게 그리고 끊임없이 연마하고 가차 없이 훈련받아야 할 수공업같은 것인데, 마치 삶이 그런 것이 아니라는 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