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움가르텐이 처음 미학이라는 기획을 소개했을 때에는 이런 원대한 추진력이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그 반대였다. 즉 바움가르텐은 미학을 순수한 유용성의 측면에서 소개했으며 노예적인 태도를 갖는 것으로 소개했던 것이다. 이 새로운 학문은 지금까지 소홀하게 다루어진 감성적 인식 능력을 개선함으로써 우리의 인식에 완전히 봉사하고 있는 것이 되었다. 미학은 질료를 제시하고, 직관을 보증하며, 표현과 이해력을 개선할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 이후에 미학은 자신의 고유한 주장들을 제시하지 못하고, 오히려 인식의 개선만을 위해 봉사하는 것으로 보였다. 바움가르텐은 미학을 학문이라는 여왕이 거주하는 성에 일하는 시녀로 소개했다.
(…)100년 후에 칸트의 토대는 니체에 의해서 계승되었으며 그 이후로 심미적인 근본에 대항해왔으나, 어느 누구도 감히 심미적인 토대에 대항할 수 없음이 확실해졌다.
아마도 가장 뛰어난 심미적 사유자인 니체는 심미화를 세 가지 방식으로 급진적으로 규정했다. 첫째, 현실은 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현실의 선험적 구조에서뿐만 아니라). 즉 사실을은 '행위된 것들'이다. 둘째, 이러한 현실의 생산은 '허구적' 수단에 의한 것이다. 직관 형식들, 기본적인 이미지들, 주된 은유들, 환영이라는 허구적 수단에 의해서 말이다. 그리고 셋째, 단 하나의 세계와 곹통적인 세계라는 경계가 허물어진다. 만약 현실이 생산의 결과라면, 우리는 다양한 세계의 출현도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니체는 이미 1873년에『비도덕적 의미에서 진리와 거짓에 관하여』라는 책의 초기 수고에서, 우리는 도처에서 허구적인 수단들과 은유적인 행위를 통해 현실을 산출한다는 사실을 지적했다(놀랍게도 칸트의 의역과 연관된다). 우리는 처음에 받은 신경 자극을 이미지로, 이것을 소리로, 결국 개념으로 바꾼다. 이러한 한 측면에서 다른 측면으로 바뀜으로써 현실이라는 계단식 인공 폭포가 생성된다. 기본적인 물리적 자극을 넘어서는 모든 곳에서 이것은 인간적인 예술의 산물이다. 우리는 "은유 형성의 충동"을 "한순강도 떨쳐버릴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인간 자신을 떨쳐버리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창조적 동물'이다.
만약 우리에게 현실이 일상적으로 산출된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으로 보인다면, 이는 우리 행위가 관여하는 부분을 습관적이며 체계적으로 망각함으로써 생긴 결과다. 인간은 "자신이 주체라는 사실을, 심지어는 '예술적으로 창조하는 주체'라는 사실을 망각함"으로써, "진리라는 감정"에 도달한다. "인간은 (…) 근원적인 직관 은유가 은유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직관 은유를 사물 그 자체로 받아들인다." 심지어 우리는 우리의 현실을 산출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은폐하거나 망각한다. 이렇게 객관성이라는 외관이 생성된다. 현실이라는 구조는 전체적으로 심미적인, 즉 산출적인 일차적 투사에 의존한다. 즉 "자유롭게 창작하고 자유롭게 만들어내는" 인간의 행위, 즉 "심미적 관계"에 기초한다. 그러나 우리는 습관적으로 그것을 지각하지 못하고 망각하거나 억압한다. 니체가 우리에게 이러한 심미적 근본 과정에 대한 억압을 일깨워주었다.
텔레비전―특이한 물리학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매체인 텔레비전으로부터 시작해보자. 만약―방송 시작 전에 보여주는 화면에서―줄무늬가 화면 공간의 깊이로부터 우리를 향하고, 마치 유령의 손에 의해서 올라가고 회전하고 뒤집어지는 삼차원적인 물체로 변하고 이차원적인 형성물로 변화된다면 그런 경험은 가장 놀라운 것에 속할 것이다. 이미 우리는 그동안 그러한 과정에 익숙해졌지만 처음에는 아주 매혹적인 것이었다. 그와 같은 것은 실재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해서, 그러한 줄무늬, 물체와 표면들은 실재 세계로부터 알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곳에는 전자 매체의 세계에서와는 다른 법칙들이 놓여 있다. 물체 물리학은 무중력적인 운동과 마술 같은 변형들을 허용하지 않는다. 실재에서 삼차원적인 것들은 실제적으로가 아니라 가상적으로 이차원적 또는 일차원적인 것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이미 수학적 구조 안에서 가능하다. 일상 세계보다 전자 이미지 세계가 수학적 구조물에 더 가까이 있다.
다른 한편, 매체 물리학은 그런 방법으로 오래된 심미적 소망들을 이행한다. 예를 들어, 초현실주의는 그러한 변형들을 꿈꾸었다. 그러나 그러한 변형들을 단지 부가적이며 비교 가능한 방식으로 불완적하게 현실화할 수 있었다. 이와 반대로 전자 이미지 조작은 그러한 변형들을 완전히 우아함과 자립성을 가진 것으로 이끈다.
만약 우리가 전자 세계의 해석학적 특수성을 명명하고자 한다면, 우선 가벼움, 자유로운 움직임, 그리고 차원과 형태의 자유로운 놀이에 관해 말해야 한다. 종합적인 이미지 공간에서 움직임은 무중력 상태에서의 운동과 유사하다. 신체는 관성, 저항, 육중함을 잃었다. 신체는 가볍게 되었다. 신체는 부유하고 기괴하고 매력적인 움직임을 수행한다. 전자 이미지 공간은 우주선의 무중력 상태와 같은 어떤 것을 가진다. 항구성 대신 자유로운 변화가 등장하며 내용들은 임의적으로 조립 가능한 것으로 된다. 게다가 현상들은 실제적인 것들과 관계가 있다 하더라도 어디에서나 이미지적이며 가상적인 측면을 지닌다. 그러나 이러한 암시는 전적으로 자유의 인덱스와 연관되어 있다. 즉 모든 것들은 또한 다른 것들이거나 다른 것들이 될 수 있다. 만약 "존재의 가벼움"이 어디엔가 있다면, 그곳은 바로 전자 공간일 것이다.
(…)100년 후에 칸트의 토대는 니체에 의해서 계승되었으며 그 이후로 심미적인 근본에 대항해왔으나, 어느 누구도 감히 심미적인 토대에 대항할 수 없음이 확실해졌다.
아마도 가장 뛰어난 심미적 사유자인 니체는 심미화를 세 가지 방식으로 급진적으로 규정했다. 첫째, 현실은 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현실의 선험적 구조에서뿐만 아니라). 즉 사실을은 '행위된 것들'이다. 둘째, 이러한 현실의 생산은 '허구적' 수단에 의한 것이다. 직관 형식들, 기본적인 이미지들, 주된 은유들, 환영이라는 허구적 수단에 의해서 말이다. 그리고 셋째, 단 하나의 세계와 곹통적인 세계라는 경계가 허물어진다. 만약 현실이 생산의 결과라면, 우리는 다양한 세계의 출현도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니체는 이미 1873년에『비도덕적 의미에서 진리와 거짓에 관하여』라는 책의 초기 수고에서, 우리는 도처에서 허구적인 수단들과 은유적인 행위를 통해 현실을 산출한다는 사실을 지적했다(놀랍게도 칸트의 의역과 연관된다). 우리는 처음에 받은 신경 자극을 이미지로, 이것을 소리로, 결국 개념으로 바꾼다. 이러한 한 측면에서 다른 측면으로 바뀜으로써 현실이라는 계단식 인공 폭포가 생성된다. 기본적인 물리적 자극을 넘어서는 모든 곳에서 이것은 인간적인 예술의 산물이다. 우리는 "은유 형성의 충동"을 "한순강도 떨쳐버릴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인간 자신을 떨쳐버리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창조적 동물'이다.
만약 우리에게 현실이 일상적으로 산출된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으로 보인다면, 이는 우리 행위가 관여하는 부분을 습관적이며 체계적으로 망각함으로써 생긴 결과다. 인간은 "자신이 주체라는 사실을, 심지어는 '예술적으로 창조하는 주체'라는 사실을 망각함"으로써, "진리라는 감정"에 도달한다. "인간은 (…) 근원적인 직관 은유가 은유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직관 은유를 사물 그 자체로 받아들인다." 심지어 우리는 우리의 현실을 산출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은폐하거나 망각한다. 이렇게 객관성이라는 외관이 생성된다. 현실이라는 구조는 전체적으로 심미적인, 즉 산출적인 일차적 투사에 의존한다. 즉 "자유롭게 창작하고 자유롭게 만들어내는" 인간의 행위, 즉 "심미적 관계"에 기초한다. 그러나 우리는 습관적으로 그것을 지각하지 못하고 망각하거나 억압한다. 니체가 우리에게 이러한 심미적 근본 과정에 대한 억압을 일깨워주었다.
텔레비전―특이한 물리학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매체인 텔레비전으로부터 시작해보자. 만약―방송 시작 전에 보여주는 화면에서―줄무늬가 화면 공간의 깊이로부터 우리를 향하고, 마치 유령의 손에 의해서 올라가고 회전하고 뒤집어지는 삼차원적인 물체로 변하고 이차원적인 형성물로 변화된다면 그런 경험은 가장 놀라운 것에 속할 것이다. 이미 우리는 그동안 그러한 과정에 익숙해졌지만 처음에는 아주 매혹적인 것이었다. 그와 같은 것은 실재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해서, 그러한 줄무늬, 물체와 표면들은 실재 세계로부터 알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곳에는 전자 매체의 세계에서와는 다른 법칙들이 놓여 있다. 물체 물리학은 무중력적인 운동과 마술 같은 변형들을 허용하지 않는다. 실재에서 삼차원적인 것들은 실제적으로가 아니라 가상적으로 이차원적 또는 일차원적인 것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이미 수학적 구조 안에서 가능하다. 일상 세계보다 전자 이미지 세계가 수학적 구조물에 더 가까이 있다.
다른 한편, 매체 물리학은 그런 방법으로 오래된 심미적 소망들을 이행한다. 예를 들어, 초현실주의는 그러한 변형들을 꿈꾸었다. 그러나 그러한 변형들을 단지 부가적이며 비교 가능한 방식으로 불완적하게 현실화할 수 있었다. 이와 반대로 전자 이미지 조작은 그러한 변형들을 완전히 우아함과 자립성을 가진 것으로 이끈다.
만약 우리가 전자 세계의 해석학적 특수성을 명명하고자 한다면, 우선 가벼움, 자유로운 움직임, 그리고 차원과 형태의 자유로운 놀이에 관해 말해야 한다. 종합적인 이미지 공간에서 움직임은 무중력 상태에서의 운동과 유사하다. 신체는 관성, 저항, 육중함을 잃었다. 신체는 가볍게 되었다. 신체는 부유하고 기괴하고 매력적인 움직임을 수행한다. 전자 이미지 공간은 우주선의 무중력 상태와 같은 어떤 것을 가진다. 항구성 대신 자유로운 변화가 등장하며 내용들은 임의적으로 조립 가능한 것으로 된다. 게다가 현상들은 실제적인 것들과 관계가 있다 하더라도 어디에서나 이미지적이며 가상적인 측면을 지닌다. 그러나 이러한 암시는 전적으로 자유의 인덱스와 연관되어 있다. 즉 모든 것들은 또한 다른 것들이거나 다른 것들이 될 수 있다. 만약 "존재의 가벼움"이 어디엔가 있다면, 그곳은 바로 전자 공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