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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MARK/humanities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김혜순

 우리는 우리의 빈 곳 때문에 살아갈 수 있다. 도로를 질주하는 동안, 앞에 가는 차가 열심히 달리면서 비켜주어 내가 앞으로 달려갈 수 있듯이 말이다. (속도가 그 빈 곳을 채우는 데 열심이긴 하지만.) 만약 너와 나 사이에 빈 곳이 없다면 우리는 살아갈 수 없다. 서로에게 질식해 이미 죽어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영원히 다시 태어나지 말기를 빌고 또 빌었을 것이다. 누군가 샴 쌍둥이처럼 붙어 있던 우리의 몸을 칼로 베어주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를 서로 사랑할 수 잇게 되었다. 이렇게 너와 나 사이의 빈 곳이 우리를 각자로 존재하게 하고, 그 빈 곳이 우리를 다 파먹어, 장차 우리를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해줄 것이다. 빈 곳이 우리를 사랑하게 하고, 빈 곳 때문에 우리는 미워한다. 내가 너를 사랑하자, 역설적으로 너와 나 사이의 이 '빈 곳'이 말할 수 없이 무겁다.


 몸은 증오를 새길 수 있는 가장 좋은 매개체이다. 다시 말해 몸은 섹슈얼라이즈된 부분들에 증오를 새김으로써 상징화되는 의미들의 구성체인 것이다. 이렇게 열등한 위치에 서게 된 몸은 세세연년토록 인간의 고정관념을 딱딱하게 만들어주는 데 기여해왔다. 딱딱한 고정관념들 속에서 욕망과 억압이 소용돌이친다. 무의식으로 진격한 남성적 욕망으로 열등한 몸이라고 여겨지는 타자에 대한 열망과 거부가 소용돌이친다. 무의식으로 진격한 남성적 욕망으로 열등한 몸이라고 여겨지는 타자에 대한 열망과 거부가 소용돌이친다. 남성적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억압된 자신의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조차 두려워, 그것을 타자, 여성의 몸에 전가시킨다. 억압된 자아일수록 거짓말과 환상으로 뒤덮인 상징화를 필요로 한다. 해방된 자아에 다가서기가 무서운 자아는 마녀 사냥을 반드시 필요로 한다. 이러한 문화적 구조가 개인의 심리를 만들어내고 사회의 환상을 만들어낸다. 그리하여 타자에 대한 가해 욕망의 스크린이 집집마다 펼쳐진다.  이것은 참다운 삶의 장을 위장시키는 스크린이며, 모순을 숨기는 스크린이다. 이것은 마치 자연이란 이간이 지배하기 위해 존재하는 인간 중심적인 견해를 만물의 척도로 삼아온 인류의 역사적 기록과 같은 맥락에서 파악될 수 있다. 자연은 타자이며, 흐르고 몰려드는. 통제하지 않으면 걷잡을 수 없이 더러운 것이라는 생각 말이다.
 여성들은 항상 환경이나 자연처럼 음모의 정치학에 의해 표현되어져왔다. 그때마다 타자성이 여성의 몸에 새겨져왔다. 여성의 몸은 차이가 새겨짐으로써만 의미를 갖는 몸이 되고 말았다. 남성의 몸은 중심에서 점점 비대해지고, 여성의 몸은 주변으로 밀린 몸, 중심이 무엇인지 모르는 몸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클라우스 테베라이트는 아우슈비츠의 군인들이 유태인을 표현할 때 '더러운, 흐르는, 점액질의, 붉은, 집어삼키는, 몰려드는, 내뱉는'과 같은 수식어 내지는 동사들을 사용하여 피억압자들의 몸을 여성의 몸처럼 '흐르고 물렁물렁한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여성의 몸은 물리적 영역, 자연과 동일시되어왔고, 남성은 인간적인 정신과 관계되어왔다. 그래서 정신이 물질을 억압하고 소유하는 것이 정당성을 가졌다.


 직선적 시간을 구부려 파동의 시간을 읽어내는 것, 시간으로 시간에 균열을, 틈새를 만들어 주체를 다의적이고 무한한 가능성에 참여하는 타자로 전환하는 것이, 시다. 자연의 시간 또한 직선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일직선이 맴맴 도는 것이 아니다. 자연의 시간은 동시적, 상황적, 연계적으로 흐른다. 동시에 자연은 내 몸과 마찬가지로 고정적 실체도 아니다. 항구적으로 존재하지도 않는다. 시 속에 들어온 자연은 우리의 가치 판단을 요구한다. 그럼에도 직접적 가치 판단은 시의 방법이 아니다. 시의 방법 속에 가치 판단이 내재되어야 한다. 자연은 보존되면서 초월하는 불교적으로 말하면 이것에 따라 저것이 일어나는 연기를 되풀이한다. 이것에 따라 저것이 일어날 땐 반드시 자기 죽음이 뒤따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김수영처럼 방만 바꾸어버렸다는 반성을 하게 된다. 시의 방법 속에서 선취한 가치 판단이 있다면 그것은 자연의 시간을 함께 사는 일이다. 가역적이면서 연계적이고 동시적인, 그래서 연기가 일어나는 시간의 죽살이를 껴안는 것이다. 안으로의 초월을 감행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