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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MARK/humanities

선악의 저편·도덕이 계보/프리드리히 니체

 아주 진지하게 말해서 사상가들의 순수함에는 그들에게 정직한 대답을 해줄 것을 원하면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의식 앞에 나타나는 것을 허용하는 감동적이고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그 무엇이 있다:예를 들어 의식은 '실재'하는 것인가, 또는 도대체 왜 의식은 외부 세계를 그렇게 단호하게 멀리하는가, 그리고 그와 같은 물음이 더 있지 않은가 등에 대해 대답해줄 것을 간청하는 것이다. '직접적인 확실성'에 대한 믿음은 우리 철학자들을 명예롭게 만드는 하나의 도덕적 순박함이다:그러나―우리는 이제 결코 '단순히 도덕적인' 인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 도덕을 도외시한다면, 그러한 믿음이란 우리를 명예롭게 만들지 못하는 어리석음이다! 시민적 생활 속에서 언제나 불신을 품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은 '나쁜 성격'의 기호로 여겨지며 따라서 어리석은 것이다:여기에서 우리들끼리 말하자면, 시민 세계의 저편과 그 긍정과 부정의 저편에서―우리의 어리석음을 방해할 것이 무엇이며, 철학자는 이제까지 지상에서 언제나 가장 우롱당해온 존재로, 바로 '나쁜 성격'을 가질 권리가 있다고 말하는 것을 방해할 것이 무엇이겠는가―오늘날 철학자는 불신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의심의 심연에서 가장 악의적인 곁눈질을 해야 할 의무가 있다.―이와 같은 음울한 찌푸린 얼굴과 어조로 농담하는 나를 용서하기 바란다:왜냐하면 바로 나 자신이야말로 오랫동안 기만하거나 기만당하는 것을 달리 생각하고, 달리 평가하는 법을 배워왔으며, 최소한 기만당하는 것에 반항하게 되는 철학자의 맹목적인 분노에 대해 옆구리를 쥐어박을 준비가 되어 있다. 왜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가? 진리가 가상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은 단지 도덕적인 선입견일 뿐이다. 이것은 심지어 이 세계에 존재하고 있는 가장 잘못 증명된 가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다음의 것은 많이 허용되어야 한다:관점적 평가와 가상성에 바탕을 두지 않는 한, 삶이란 것은 전혀 존립할 수가 없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많은 철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도덕적인 감격과 우매함으로 '가상의 세계'를 완전히 없애버리려고 한다면, 이제 그대들이 이것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가정해보면, ―그러면 최소한 이때 그대들이 말하는 '진리'라는 것 역시 더 이상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실로 무엇이 도대체 우리가 '참'과 '거짓'이라는 본질적인 대립이 있다고 가정하도록 강요하는가? 가상성의 단계가 있다는 것을 가정하는 것으로. 그리고 마치 가상의 좀더 밝고 어두운 음영과 전체적인 색조처럼―화가의 언어로 말하자면 다양한 색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은가/ 우리와 어떤 관계가 있는 이 세계가 왜 허구여서는 안 되는가? 이때 "그러나 허구에는 창작자가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라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왜 있어야만 하는가하고 묻는 사람에게는 명백하게 대답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러한 '있다'는 것이 아마 허구에 속하는 것은 아닐까? 술어나 목적어에 대한 것과 마찬가지로 주어에 대해서도 결국 어느 정도는 역설적이어도 되지 않는가? 철학자는 문법에 대한 믿음을 넘어서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여자 가정교사들에게 모두 경의를 표하자:그러나 철학이 여자 가정교사의 믿음과 결별해야 할 시기가 되지 않았는가?


잠언과 간주곡
64. '인식을 위한 인식' ― 이것은 도덕이 만들어놓은 마지막 함정이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다시 한번 완전히 그 안으로 빠져 들어간다.
91.너무나 차갑고 얼음 같아 사람들은 그에게서 손에 화상을 입는다! 그를 만지는 손은 모두 깜짝 놀란다! ―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많은 사람이 그를 뜨겁게 달아오른 사람으로 여긴다.
93.상냥함에는 인간에 대한 증오 같은 것은 전혀 없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간에 대한 경멸이 너무나 많은 것이다.


두려워해야 할 것, 다른 어떤 숙명보다도 숙명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커다란 공포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커다란 혐오이다. 또한 마찬가지로 인간에 대한 커다란 동정이다. 만일 어느 날 이 두 가지가 교미를 한다면, 어찌할 방법 없이 바로 가장 섬뜩한 어떤 것이, 즉 인간의 '최후의 의지', 허무를 지향하는 그의 의지, 허무주의가 세상에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실 이것을 위한 많은 준비가 이루어지고 있다. 냄새를 맡기 위한 코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눈과 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가 오늘 날에도 들어가는 곳이면 거의 어디서나 정신병원이나 병원의 공기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당연히 인간의 문화권이나 바로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유럽'에 관한 것이다. 인간의 가장 커다란 위험은 병자이다:악인이나 '맹수'가 아니다. 처음부터 실패자, 패배자, 좌절한 자―가장 약한 자들인 이들은 대부분 인간의 삶의 토대를 허물어버리고, 삶이나 인간이나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신뢰에 가장 위험하게 독을 타서 그것을 이심하게 만드는 자들이다. 어디에서 사람들은 깊은 비탄이 실려오는 저 가려진 눈길을, 그러한 인간이 자기 스스로에게 말하는 바를 드러내는 선천적 불구자의 저 내형적인 눈길을­―탄식하는 저 눈길을 벗어날 수 있단 말인가. 이 눈길은 이렇게 탄식한다:"내가 다른 어떤 존재였으면 좋았을 것을! 그러나 희망이 없다. 나는 나 자신인 것이다:내가 어떻게 나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어쨋든―나는 나 자신에 대해 진저리가 난다!"……자기 경멸의 이러한 땅 위에서, 진정한 늪지대에서 모든 잡초, 온갖 독초들이 자라나며, 이 모든 것은 그렇게 작게, 그렇게 숨어서, 그렇게 비열하게, 그렇게 달콤하게 자라나는 것이다. 여기에는 복수의 감정이나 뒤에 남은 감정의 벌레들이 우글거린다. 여기에는 비밀스러움과 은폐의 냄새가 악취를 풍긴다. 여기에는 언제나 악의적인 음모의 그물이― 잘난 인간들이나 승리한 인간들에 대한 고통받는 자의 음모가 거미줄을 치게 된다. 여기에서 승리한 인간의 모습은 증오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증오를 증오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이 무슨 기만인가! 무슨 호언장담이나 태도를 소모하고 있으며, 얼마나 '대단한' 비방의 기교인가! 이러한 못난 자의 입에서 어떤 고귀한 웅변이 흘러 나온단 말인가! 그들의 눈에는 얼마나 많은 달콤하고 끈적거리고 검혀한 복정이 젖어 있을 것인가!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바라고 있는 것일까? 최소한 정의, 사랑, 지혜, 우월감을 나타내는 것­­―이것이 이러한 '최하층 인간', 이러한 병자의 야심인 것이다! 그러한 야심은 사람들을 얼마나 능숙하게 만드는가! 특히 여기에서 덕을 각인하는 것이나 심지어 울리는 소리마저도, 덕의 황금의 음색까지도 모방하게 되는 위조지폐자의 능숙함은 놀랄 만하다. 그들, 이러한 약자들이나 치료할 수 없는 병자들은 이제 덕을 완전히 스스로 독점했는데, 이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즉 "우리만이 선한 인간이며, 외로운 인간이다. 우리만이 선한 의지를 가진 인간이다." 그들은 생생한 비난으로, 우리들에 대한 경고로 우리 주변을 배회한다.― 마치 건강, 성공, 강함, 자부심, 힘의 감정 자체가 이미 사람들이 언젠가는 그 대가를, 쓰라린 대가를 치러야 할 사악한 것처럼 말이다:오, 얼마나 그들은 근본적으로 대가를 치르게 만들 준비가 되어 있으며, 얼마나 그들은 사형 집행인이 되기를 갈망하고 있는 걸일까! 그들 가운데는 재판관으로 변신한 복수심에 들끓는 사람이 가득하며, 이들은 언제나 독침처럼 '정의'라는 말을 입에 담고, 언제나 입을 뾰족 세워, 불만족스럽게 사물을 보지 않고 기분 좋게 거리를 걷는 모든 사람에게 언제나 침을 뱉을 준비가 되어 있다. 그들 가운데는 또한 저 허영에 찬 가장 구역질나는 유형의 인간이 없는 것도 아니며, '아름다운 영혼'을 나타내려고 하며, 일그러진 관능을 시구나 기저귀에 싸, '마음의 순수'로 시장에 내놓으려는 거짓된 불구자들이 없는 것도 아니다:이것이 도덕으로 자위행위를 하는 인간이나 '자기 만족자'의 유형이다. 어떤 형태의 우월감을 나타내고자 하는 병자들의 의지나 건강한 자들을 압제하는 사잇길을 찾는 그들의 본능­―실로 가장 약한 자들의 힘을 향한 이러한 의지가 발견되지 않는 곳이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