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후에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우리가 생전에 겪었던 것의 어떤 변형일 뿐이다. 유사한 풍경, 유사한 피조물들만 마주칠 것이다. 홀로 있을까, 아니면 무리 지어 있을까? 아, 아무래도 홀로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이미 삶의 세계에서도 고독은 희귀한데, 사후 세계에서야 말할 것도 없지 않은가! 산 자보다 죽은 자들이 훨씬 많지 않은가!
그녀는 영국 여왕의 여동생을 생각하면서, 이제는 하느님의 눈동자가 사진기로 대체된 거라고 중얼거렸다. 유일자의 눈이 모든 사람들의 눈동자로 대체되었다. 삶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참여하는 거대한 난교 파티로 변해 버렸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열대지방의 한 해변에서 알몸으로 생일파티를 벌이는 그 영국 황녀를 볼 수 있지 않은가. 물론 사진기는 유명 인사에게만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비행기가 당신 근처에 추락하고 불꽃이 당신의 셔츠에 옮겨 붙기만 해도 당신 역시 유명해져 이 전일적인 난교 파티 속으로 들어간다. 아무도 그 어디에도 몸을 숨길 수가 없으며 모든 사람이 다른 모든 사람들의 처분 아래 있음을 엄숙히 선언하는, 환락과는 전혀 무관한 난교 파티에 말이다.
침실, 그것은 결혼의 제단이다. 그만큼 희생적이기에 제단이다. 그들이 서로 희생하는 곳이 바로 거기다.
<1부 얼굴>
아, 어째서 그녀는 원본들을 제때 불살라 버리지 않았는가?
하지만 그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라. 당신에게 매우 소중한 내밀한 물건들을 불살라 버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한다는 건 이제 당신에게는 남은 시간이 없으며, 내일 곧 죽는다는 것을 자인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 파괴 행위를 무한정 연기하게 되며,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너무 늦고 만다.
우리는 불멸을 생각하지만, 죽음과 함께 생각해야 함을 망각하는 것이다.
베타나는 음악을 공부했고 직접 몇몇 소품곡을 작곡하기도 했으므로 물론 베토벤 음악의 새로운 점과 아름다운 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이렇게 묻고 싶다. 그녀가 베토벤의 음악에 사로잡혔다면 정말 음악 그 자체에, 그의 그 음정들에 매료됐던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그의 음악이 표상하는 것, 다시 말해서 베티나와 그녀의 시대가 공유하는 이념이나 태도와 그의 음악 사이의 모호한 근친성에 매료됐던 것인가? 사실 예술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기나 하며 언제 존재한 적이 있었던가? 그것은 환상이 아닌가? 레닌이 베토벤의 열정을 가장 좋아한다고 선언했을 때, 실제로 그가 좋아한 것은 무엇인가? 그는 무엇을 들었는가? 음악을? 아니면 피와 우애와 교수형과 정의와 절대에 홀린, 자기 영혼의 화려한 움직임들을 상기시키는 어떤 고귀한 소란을 들었는가? 그는 음악을 들었는가, 아니면 그 음악을 통해 예술이나 아름다움과 전혀 무관한 어떤 몽상 속으로 빨려 들어갔는가?
헤밍웨이가 말한다. "보세요, 요한. 나 역시 그들의 영원한 구형에서 빠져나갈 수 없는 신세랍니다. 나의 책을 읽는 대신 그들은 나에 관한 책을 써 댑니다. 내가 여편네들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하고, 아들을 잘 돌보지 않았다고도 합니다. 어느 비평가의 입을 찢어 놓았고, 성실하지 않았으며, 너무 오만했고, 남성우월주의에 사로잡혔다고도 합니다. 전쟁터에서 입은 상처가 이백여섯 군데이면서 이백서른 군데라고 떠벌렸다질 않나, 내가 상습적으로 수음을 했다는 둥, 어머니에게 매우 고약하게 굴었다는 얘기도 해 대지요."
"그것이 바료 불멸인 걸 어쩌겠습니까." 하고 괴테가 대답한다. "불멸은 영원의 소송이죠."
"영원한 소송이라면 진짜 판사가 있어야죠! 채찍 든 시골 초등학교 여고사가 아니라 말입니다."
"시골 초등학교 여교사가 휘두르는 그 채찍, 바로 그것이 영원한 소송이에요? 당신은 다른 걸 상상하셨나요, 어니스트?"
"난 아무것도 상상하지 않았어요. 단지 죽은 뒤엔 좀 조용히 살 수 있길 바랐을 뿐이죠."
"당신은 불멸이 되려고 온 힘을 다 기울였습니다."
"말도 안 돼요. 난 그저 책을 썼을 뿐입니다."
"바로 그거죠!" 하고 괴테가 웃음을 터뜨렸다.
<2부 불멸>
루벤스는 언젠가 존 케네디 대통령의 오래된 사진집을 손에 넣은 일이 있었다. 적어도 오십여 장은 되는 그 사진들은 모두 컬러였으며, 그 모든 사진들에서 (하나도 예외 없이 모두!) 대통령은 웃고 있었다. 미소를 지은 게 아니라, 활짝 웃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입은 크게 벌어졌으며, 이들이 드러나 있었다. 요즘 사진들에선 흔히 볼 수 있으므로 특별히 이상할 건 전혀 없었으나, 케네디가 모든 사진들에서 웃고 있다는 사실, 그의 입이 한 번도 다물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서 루벤스는 한참 동안이나 어안이 벙벙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그는 피렌체를 방문했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 앞에 서서 그는 그 대리석상의 얼굴이 케네디 얼굴처럼 웃고 있다고 상상해 보았다. 남성미의 전형 다비드가 문득 멍청이처럼 보였다! 그때부터 그는 머릿속으로 명화의 얼굴들에 웃는 입을 갖다 붙이는 습관이 생겼다. 흥미로운 실험이었다. 웃는 표정이 모든 그림을 파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모나리자의 그 은은한 미소 대신 이와 잇몸까지 드러내는 웃음이 있다고 상상해 보라!
가장 많은 시간을 바친 곳이기에 화랑에 친숙한 루벤스였으나, 그 카네디 대통령의 사진들을 보기 전까지는 이러한 자명한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즉 고대에서부터 라파엘에 이르기까지, 어쩌면 앵그르에 이르기까지 위대한 화가와 조각가들이 웃음을, 심지어는 미소마저도 형상화하길 기피했다는 사실 말이다. 에트루리아 조각의 얼굴들이 모두 미소 짓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미소는 하나의 표정, 즉 어떤 상황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이 아니라, 영원한 행복으로 빛나는 얼굴의 지속적인 상태다. 고대 조각가들에게나 후대 화가들에게나, 아름다운 얼굴이란 그 부동성 속에서만 생각할 수 있는 것이었다.
얼굴이 부동성을 상실하고 입이 벌어진 것은 화가들이 악을 포착하고자 했을 때뿐이었다. 고통으로서의 악인 경우, 예수의 시신 위에 몸울 숙인 여자들의 얼굴이 그랬고, 푸생의 '무고한 유아 학살'에서 어느 어머니의 벌어진 입이 그랬다. 악덕으로서의 악으로는, 홀바인의 '아담과 이브'가 있다. 이브가 달뜬 얼굴을 하고 있고, 그녀의 반쯤 벌어진 입에서 지금 막 사과를 깨문 치아가 보인다. 그녀 곁 아담은 아직은 원죄를 범하기 전의 인간이다. 그의 얼굴은 고요하며 입은 닫혀 있다. 코레지오의 '악덕의 알레고리'에서는 모든 사람이 미소를 짓고 있다! 악을 표현하기 위해 화가는 미소로 용모를 일그러뜨리고 입이 벌어지게 하여, 얼굴들의 순수한 평정을 뒤흔들어 놓아야 했던 것이다. 이 그림에서 크게 웃는 유일한 인물은 한 어린아이다! 그러나 그 아이의 웃음은 초콜릿이나 기저귀 광고 속 어린아이들이 보여 주는 그런 행복한 웃음이 아니다 그 그림 속 아이는 타락했기 때문에 웃는 것이다!
웃음이 무죄인 것은 네덜란드인들에게서뿐이다. 할스의 '부풍'이나 그의 '보헤미안'같은 작품이 그렇다. 그런 네덜란드 화가들은 최초의 사진사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리는 얼굴들은 아름다움과 추함 저 너머에 있다. 네덜란드 화가들의 그림이 전시된 홀에서 걸음을 늦추며, 루벤스는 류티스트를 생각했고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류티스트는 프란스 할스의 모델은 아니다. 류티스트는 움직이지 않는 얼굴에서 아름다움을 찾았던, 위대한 지난날 화가들의 모델이다.' 그러고 있는데 몇몇 방문객이 그의 등을 밀쳤다. 이 세상 모든 화랑들이 마치 지난날 동물원처럼, 사람들 무리로 가득하다. 구경거리를 좇는 관광객들은 그림들을 우리 안 짐승을 구경하듯 바라보았다. 이제 그림은 금세기에 이르러 더는 제집에 있는 게 아니라고 루벤스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류티스트 역시 이와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류티스트는 아름다움이 웃지 않는 세계, 이미 오래전에 끝장난 세계의 사람이었다.
한데 위대한 화가들이 아름다움의 왕국에서 웃음을 배제한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얼굴은 사유의 현존을 반영할 때 아름다운데, 웃음의 순간은 사유가 없는 순간이기 때문이라는 게 루벤스의 생각이다. 그게 사실일까? 웃음이란 뭔가 우수운 것을 포착 중인 성찰의 반짝임이 아닐까? 아니다, 하고 루벤스는 중얼거린다. 우스운 것을 포착하는 그 순간에는 웃음이 없다. 웃음은 그 직후에, 마치 어떤 신체 반응처럼, 어떤 사유도 없는 하나의 발작처럼 뒤따른다. 웃음은 얼굴의 발작이며, 이 발작이 일어날 대 인간은 자신을 통제하지 못한다. 자신이 의지도 이성도 아닌 뭔가에 지배당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대 조각가는 웃음을 표상하지 않았다. 스스로를 다스리지 못하는 인간(이성 저 너머의 인간, 의지 저 너머의 인간)은 아름답게 여겨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위대한 화가들의 정신 세계와는 달리, 이 시대가 웃음을 인기 있는 표정으로 만들었다면, 그것은 곧 이성과 의지의 부재가 인간의 이상적 상태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어쩌면 사람들은 인물 사진들에 나타난 그 발작은 꾸며 낸 것이며, 따라서 의식적이고 의지적인 것이라고 이의를 제기할지도 모른다. 어느 사진사의 카메라 앞에서 웃고 있는 케네디는 결코 어떤 우스운 상황에 반응한 게 아니라, 의식적으로 입을 크게 벌리고 이를 드러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다만 웃음의 발작(의지와 이성 저 너머의 것)이 오늘날 인간들에게 이상적 이미지로 정립되었음을 증명해 줄 뿐이다. 그 뒤에 자신들을 숨기기로 선택한 이미지 말이다.
루벤스는 웃음이야말로 가장 민주적인 표정이라고 생각했다. 얼굴의 부동성은 우리를 서로 구분 짓는 용모들 각각을 또렷이 분간할 수 있게 하지만, 웃음의 발작 안에서는 우리 모두가 비슷해지기 때문이다.
웃음으로 뒤틀어진 줄리우스 카이사르의 흉상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그러나 미국 대통령들은 웃음의 민주적 발작 뒤에 숨어 영원을 향해 떠나고 있다.
<6부 문자반>
그녀는 영국 여왕의 여동생을 생각하면서, 이제는 하느님의 눈동자가 사진기로 대체된 거라고 중얼거렸다. 유일자의 눈이 모든 사람들의 눈동자로 대체되었다. 삶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참여하는 거대한 난교 파티로 변해 버렸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열대지방의 한 해변에서 알몸으로 생일파티를 벌이는 그 영국 황녀를 볼 수 있지 않은가. 물론 사진기는 유명 인사에게만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비행기가 당신 근처에 추락하고 불꽃이 당신의 셔츠에 옮겨 붙기만 해도 당신 역시 유명해져 이 전일적인 난교 파티 속으로 들어간다. 아무도 그 어디에도 몸을 숨길 수가 없으며 모든 사람이 다른 모든 사람들의 처분 아래 있음을 엄숙히 선언하는, 환락과는 전혀 무관한 난교 파티에 말이다.
침실, 그것은 결혼의 제단이다. 그만큼 희생적이기에 제단이다. 그들이 서로 희생하는 곳이 바로 거기다.
<1부 얼굴>
아, 어째서 그녀는 원본들을 제때 불살라 버리지 않았는가?
하지만 그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라. 당신에게 매우 소중한 내밀한 물건들을 불살라 버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한다는 건 이제 당신에게는 남은 시간이 없으며, 내일 곧 죽는다는 것을 자인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 파괴 행위를 무한정 연기하게 되며,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너무 늦고 만다.
우리는 불멸을 생각하지만, 죽음과 함께 생각해야 함을 망각하는 것이다.
베타나는 음악을 공부했고 직접 몇몇 소품곡을 작곡하기도 했으므로 물론 베토벤 음악의 새로운 점과 아름다운 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이렇게 묻고 싶다. 그녀가 베토벤의 음악에 사로잡혔다면 정말 음악 그 자체에, 그의 그 음정들에 매료됐던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그의 음악이 표상하는 것, 다시 말해서 베티나와 그녀의 시대가 공유하는 이념이나 태도와 그의 음악 사이의 모호한 근친성에 매료됐던 것인가? 사실 예술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기나 하며 언제 존재한 적이 있었던가? 그것은 환상이 아닌가? 레닌이 베토벤의 열정을 가장 좋아한다고 선언했을 때, 실제로 그가 좋아한 것은 무엇인가? 그는 무엇을 들었는가? 음악을? 아니면 피와 우애와 교수형과 정의와 절대에 홀린, 자기 영혼의 화려한 움직임들을 상기시키는 어떤 고귀한 소란을 들었는가? 그는 음악을 들었는가, 아니면 그 음악을 통해 예술이나 아름다움과 전혀 무관한 어떤 몽상 속으로 빨려 들어갔는가?
헤밍웨이가 말한다. "보세요, 요한. 나 역시 그들의 영원한 구형에서 빠져나갈 수 없는 신세랍니다. 나의 책을 읽는 대신 그들은 나에 관한 책을 써 댑니다. 내가 여편네들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하고, 아들을 잘 돌보지 않았다고도 합니다. 어느 비평가의 입을 찢어 놓았고, 성실하지 않았으며, 너무 오만했고, 남성우월주의에 사로잡혔다고도 합니다. 전쟁터에서 입은 상처가 이백여섯 군데이면서 이백서른 군데라고 떠벌렸다질 않나, 내가 상습적으로 수음을 했다는 둥, 어머니에게 매우 고약하게 굴었다는 얘기도 해 대지요."
"그것이 바료 불멸인 걸 어쩌겠습니까." 하고 괴테가 대답한다. "불멸은 영원의 소송이죠."
"영원한 소송이라면 진짜 판사가 있어야죠! 채찍 든 시골 초등학교 여고사가 아니라 말입니다."
"시골 초등학교 여교사가 휘두르는 그 채찍, 바로 그것이 영원한 소송이에요? 당신은 다른 걸 상상하셨나요, 어니스트?"
"난 아무것도 상상하지 않았어요. 단지 죽은 뒤엔 좀 조용히 살 수 있길 바랐을 뿐이죠."
"당신은 불멸이 되려고 온 힘을 다 기울였습니다."
"말도 안 돼요. 난 그저 책을 썼을 뿐입니다."
"바로 그거죠!" 하고 괴테가 웃음을 터뜨렸다.
<2부 불멸>
루벤스는 언젠가 존 케네디 대통령의 오래된 사진집을 손에 넣은 일이 있었다. 적어도 오십여 장은 되는 그 사진들은 모두 컬러였으며, 그 모든 사진들에서 (하나도 예외 없이 모두!) 대통령은 웃고 있었다. 미소를 지은 게 아니라, 활짝 웃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입은 크게 벌어졌으며, 이들이 드러나 있었다. 요즘 사진들에선 흔히 볼 수 있으므로 특별히 이상할 건 전혀 없었으나, 케네디가 모든 사진들에서 웃고 있다는 사실, 그의 입이 한 번도 다물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서 루벤스는 한참 동안이나 어안이 벙벙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그는 피렌체를 방문했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 앞에 서서 그는 그 대리석상의 얼굴이 케네디 얼굴처럼 웃고 있다고 상상해 보았다. 남성미의 전형 다비드가 문득 멍청이처럼 보였다! 그때부터 그는 머릿속으로 명화의 얼굴들에 웃는 입을 갖다 붙이는 습관이 생겼다. 흥미로운 실험이었다. 웃는 표정이 모든 그림을 파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모나리자의 그 은은한 미소 대신 이와 잇몸까지 드러내는 웃음이 있다고 상상해 보라!
가장 많은 시간을 바친 곳이기에 화랑에 친숙한 루벤스였으나, 그 카네디 대통령의 사진들을 보기 전까지는 이러한 자명한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즉 고대에서부터 라파엘에 이르기까지, 어쩌면 앵그르에 이르기까지 위대한 화가와 조각가들이 웃음을, 심지어는 미소마저도 형상화하길 기피했다는 사실 말이다. 에트루리아 조각의 얼굴들이 모두 미소 짓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미소는 하나의 표정, 즉 어떤 상황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이 아니라, 영원한 행복으로 빛나는 얼굴의 지속적인 상태다. 고대 조각가들에게나 후대 화가들에게나, 아름다운 얼굴이란 그 부동성 속에서만 생각할 수 있는 것이었다.
얼굴이 부동성을 상실하고 입이 벌어진 것은 화가들이 악을 포착하고자 했을 때뿐이었다. 고통으로서의 악인 경우, 예수의 시신 위에 몸울 숙인 여자들의 얼굴이 그랬고, 푸생의 '무고한 유아 학살'에서 어느 어머니의 벌어진 입이 그랬다. 악덕으로서의 악으로는, 홀바인의 '아담과 이브'가 있다. 이브가 달뜬 얼굴을 하고 있고, 그녀의 반쯤 벌어진 입에서 지금 막 사과를 깨문 치아가 보인다. 그녀 곁 아담은 아직은 원죄를 범하기 전의 인간이다. 그의 얼굴은 고요하며 입은 닫혀 있다. 코레지오의 '악덕의 알레고리'에서는 모든 사람이 미소를 짓고 있다! 악을 표현하기 위해 화가는 미소로 용모를 일그러뜨리고 입이 벌어지게 하여, 얼굴들의 순수한 평정을 뒤흔들어 놓아야 했던 것이다. 이 그림에서 크게 웃는 유일한 인물은 한 어린아이다! 그러나 그 아이의 웃음은 초콜릿이나 기저귀 광고 속 어린아이들이 보여 주는 그런 행복한 웃음이 아니다 그 그림 속 아이는 타락했기 때문에 웃는 것이다!
웃음이 무죄인 것은 네덜란드인들에게서뿐이다. 할스의 '부풍'이나 그의 '보헤미안'같은 작품이 그렇다. 그런 네덜란드 화가들은 최초의 사진사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리는 얼굴들은 아름다움과 추함 저 너머에 있다. 네덜란드 화가들의 그림이 전시된 홀에서 걸음을 늦추며, 루벤스는 류티스트를 생각했고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류티스트는 프란스 할스의 모델은 아니다. 류티스트는 움직이지 않는 얼굴에서 아름다움을 찾았던, 위대한 지난날 화가들의 모델이다.' 그러고 있는데 몇몇 방문객이 그의 등을 밀쳤다. 이 세상 모든 화랑들이 마치 지난날 동물원처럼, 사람들 무리로 가득하다. 구경거리를 좇는 관광객들은 그림들을 우리 안 짐승을 구경하듯 바라보았다. 이제 그림은 금세기에 이르러 더는 제집에 있는 게 아니라고 루벤스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류티스트 역시 이와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류티스트는 아름다움이 웃지 않는 세계, 이미 오래전에 끝장난 세계의 사람이었다.
한데 위대한 화가들이 아름다움의 왕국에서 웃음을 배제한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얼굴은 사유의 현존을 반영할 때 아름다운데, 웃음의 순간은 사유가 없는 순간이기 때문이라는 게 루벤스의 생각이다. 그게 사실일까? 웃음이란 뭔가 우수운 것을 포착 중인 성찰의 반짝임이 아닐까? 아니다, 하고 루벤스는 중얼거린다. 우스운 것을 포착하는 그 순간에는 웃음이 없다. 웃음은 그 직후에, 마치 어떤 신체 반응처럼, 어떤 사유도 없는 하나의 발작처럼 뒤따른다. 웃음은 얼굴의 발작이며, 이 발작이 일어날 대 인간은 자신을 통제하지 못한다. 자신이 의지도 이성도 아닌 뭔가에 지배당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대 조각가는 웃음을 표상하지 않았다. 스스로를 다스리지 못하는 인간(이성 저 너머의 인간, 의지 저 너머의 인간)은 아름답게 여겨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위대한 화가들의 정신 세계와는 달리, 이 시대가 웃음을 인기 있는 표정으로 만들었다면, 그것은 곧 이성과 의지의 부재가 인간의 이상적 상태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어쩌면 사람들은 인물 사진들에 나타난 그 발작은 꾸며 낸 것이며, 따라서 의식적이고 의지적인 것이라고 이의를 제기할지도 모른다. 어느 사진사의 카메라 앞에서 웃고 있는 케네디는 결코 어떤 우스운 상황에 반응한 게 아니라, 의식적으로 입을 크게 벌리고 이를 드러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다만 웃음의 발작(의지와 이성 저 너머의 것)이 오늘날 인간들에게 이상적 이미지로 정립되었음을 증명해 줄 뿐이다. 그 뒤에 자신들을 숨기기로 선택한 이미지 말이다.
루벤스는 웃음이야말로 가장 민주적인 표정이라고 생각했다. 얼굴의 부동성은 우리를 서로 구분 짓는 용모들 각각을 또렷이 분간할 수 있게 하지만, 웃음의 발작 안에서는 우리 모두가 비슷해지기 때문이다.
웃음으로 뒤틀어진 줄리우스 카이사르의 흉상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그러나 미국 대통령들은 웃음의 민주적 발작 뒤에 숨어 영원을 향해 떠나고 있다.
<6부 문자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