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OOKMARK/literature

작은 것들의 신/아룬다티 로이

 "내가 경위 아저씨에게 뭐라고 해야 할까? 우리 어떻게 하자고 했지? 너희들 엄마를 구하고 싶으냐, 아니면 감옥에 보내고 싶으냐?"
 그녀는 마치 두 가지 재미있는 일을 놓고 선택을 하라는 투였다. 돼지를 씻길래, 낚시질을 하러 갈래?
 쌍둥이 남매가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똑같이는 아니더라도 거의 동시에 겁먹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엄마를 구해요."
 그 뒤로 여러 해 동안 그 아이들은 머릿속으로 그 장면을 수없이 재연할 것이다. 어린아이로서, 10대 소년 소녀로서, 성인으로서. 그들은 속임수에 넘어가서 그런 짓을 했던 것일까? 꾐에 넘어가 유죄를 입증했던 것일까?
 어떻게 본다면 그랬다. 하지만 그처럼 간단하지만은 않았다. 그 아이들은 모두 저희에게 선택권이 주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선택을 하는 데서 얼마나 신속했던가! 그 아이들은 고개를 들고 이렇게 말하기까지(똑같이는 아니더라도 거의 동시에) 채 1초로 생각해 보지 않았다. 엄마를 구해요. 우리를 구하고 우리 엄마를 구해요.
 막내 코차마가 싱긋이 웃었다. 안도감이 설사약처럼 작용했다. 그녀는 화장실을 가야 했다. 그것도 급하게. 그녀는 문을 열고 경위를 불러달라고 했다.
 "얘들은 착한 애들이에요. 이 아이들이 같이 갈 거에요."
(...)
 유리창 안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에스타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힘겹게 그르렁거리는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누군가가 스위치를 올리자 눈이 멀 것처럼 환한 빛 속으로 더껑이가 진 미끄러운 바닥에 벨루타가 나타났다. 현대의 전등불에 불려나온 짓이겨진 정령. 그는 흙 묻은 문두마저 번겨진 알몸이었다. 그의 머리통에서 비밀처럼 피가 배어나왔다. 그의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고 그의 머리는 호박처럼, 그것이 자라난 줄기에 비해 너무 크고 무거운 호박처럼 보였다. 위아래가 바뀐 기괴한 미소를 짓고 있는 호박. 경찰 구둣발들이 그에게서 번진 오줌 웅덩이 가장자리로부터 물러나자 그 웅덩이에 환한 알전구가 반사되었다.
 에스타의 마음속으로 죽은 물고기가 떠올랐다. 경찰 하나가 발로 벨루타를 쿡쿡 찔렀다. 아무런 반응도 없자 토마스 매튜 경위가 쪼그려앉아서 자기의 지프차 키로 벨루타의 발바닥을 세게 긁었다. 퉁퉁 붓고 피가 번진 눈이 떠지더니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다가 사랑하는 아이에게 초점을 맞췄다. 에스타는 그의 어떤 부분이 웃었다고 생각했다. 그의 입이 아니라 다치지 않은 다른 어떤 부분이. 그것은 어쩌면 그의 팔꿈치나 어깨일 수도 있었다.
 경위가 질문을 하자 에스타의 입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어린 시절이 발꿈치를 들고 나갔다. 그리고 침묵이 빗장처럼 밀려들어왔다. 누군가가 불을 껐고 벨루타는 사라졌다.




 23년 뒤, 노란 티셔츠를 입은 가무잡잡한 여자, 라헬이 어둠 속에서 에스타를 돌아보았다.
 "에스타파피차첸 쿠타펜 피터 몬,"
 그녀가 속삭이는 목소리로, 그들의 아름다운 어머니의 입으로 움직였다.
 아주 똑바로 앉아서 체포되기를 기다리는 에스타가 그녀의 입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그 입이 내는 소리를 만지기 위해, 속삼임을 지키기 위해. 그의 손가락이 입 모양을 따라가다가 이에 닿았다. 라헬이 그의 손을 잡고 입을 맞추었다. 부서진 빗방울로 젖은 서늘한 뺨에 꼭 갖다 대고서.

 그녀가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그의 몸에 팔을 두르고 그를 자기 옆으로 끌어당겼다. 그들은 오랫동안 그렇게 누워 있었다. 어둠과 정적과 공허 속에서 눈을 뜬 채로.
 늙지도 젊지도 않은.
 그러나 살 수도 죽을 수도 있는 나이.

 그들은 우연히 만난 낯선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삶이 시작되기 전부터 서로를 알고 있었다.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마치의 기준에 따라 사랑으로부터 섹스를, 감정으로부터 욕구를 갈라놓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라헬의 눈을 통해 지켜본 사람이 아무도 없기는 했겠지만, 창 밖으로 바다나 강에 떠 있는 배나 또는 안개 속에서 모자를 쓰고 지나가는 행인을 내다본 사람이 아무도 없기는 했겠지만. 날씨가 약간 춥고 약간 습기차고 아주 조용하기는 했겠지만. 그러나 무슨 할 말이 있었을까?
 그저 눈물이 있었다고만 하자. 정적과 공허가 겹쳐진 스푼처럼 꼭 들어맞았다고만 하자. 사랑스러운 목 아래쪽의 음푹 파인 곳에서 흐느낌이 일었다고만. 꿀 빛깔의 단단한 어깨에 반원형 이빨 자국이 나 있었다고만. 그들이 한참 뒤에까지 서로를 꼬 끌어안고 있었다고만. 그들이 함께했던 밤은 기쁨이 아니라 끔찍한 슬픔이었다고만 하자. 그들은 한 번 더 다시 사랑의 법칙을 깨뜨렸다고만 하자. 누구를 어떻게 얼마나 많이 사랑해야 할지를 정한 법칙을.





 이제 중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오직 그 한 가지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그것을 알고 있었다.
 더 나중에, 그 밤에 뒤이은 십삼일간의 밤 동안, 그들은 본능적으로 작은 것들에만 매달렸다. 큰 것들은 안에 잠복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자기네들이 아무데로도 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미래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작은 것들에만 매달렸다.
 그들은 서로의 엉덩이에 난 개미에게 물린 자국을 보고 웃었다. 나뭇잎 가장자리에서 미끄러져 떨어진 서툰 노래기를 보고. 뒤집혀서 제 힘으로는 일어나지 못하는 풍뎅이를 보고. 열심히 싹싹 비는 사마귀를 보고. 역사의 집 뒤 베란다 벽의 갈라진 틈서리에 살면서 쓰레기 조각―나방의 날개 쪼가리, 거미줄의 일부, 먼지, 썩은 잎사귀, 죽은 벌의 속이 빈 흉곽―으로 몸을 가린 조그만 거미를 보고.
 벨루타는 그 거미를 차푸 탐부란, 쓰레기의 왕이라고 불렀다. 어느 날 밤 그들은 거미의 옷장에 새 옷(마늘 껍질)을 넣어주었다가 그 거미가 그들의 취향을 비웃기라도 하듯 다른 옷들까지 모두 벗어던지자 마음이 몹시 상했다. 거미는 심술이 나서 코딱지 색의 알몸을 하고 있었다. 그 뒤로 며칠 동안 그 거미는 자살이라도 할 것처럼 알몸으로 거드럭거렸고, 버려진 껍질은 시대에 뒤떨어진 세계관처럼, 낡아빠진 철학처럼 그대로 걸려 있다가 부스러졌다. 그리고 차푸 탐부란은 차츰차츰 새 옷에 길이 들었다.
 그들은 서로에게건 자기들 스스로에게건 그 점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운명과 미래(그들의 사랑, 광기, 히망, 무한한 기쁨)를 그 거미에게 결부시키고 매일 밤마다 점점 더 커가는 두려움을 가지고 그 거미가 그날 하루를 살아 남았는지 확인했다. 그들은 그 거미가 나약하고 작은 것에, 적절한 위장을 떨쳐낸 것에, 겉으로 보기에는 자기 파멸적인 자존심에 애를 태웠지만 그 거미의 취향과 느릿느릿한 위엄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들은 자기네들의 믿음을 나약하고 작은 것에 걸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 거미를 택했다. 헤어질 때마다 그들은 서로에게서 작은 약속밖에 받아내지 않았다.
 "내일?"
 "내일."
 그들은 사정이 하루 만에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점에서는 그들이 옳았다.
 하지만 그들은 차푸 탐부란에 대해서는 잘못 알았다. 그 거미는 벨루타보다 오래오래 살아서 다음 세대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 거미는 자기 명대로 다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