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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MARK/literature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윤흥길

내 아이만 유난히 얼굴이 하얗다. 다른 애들이 지나치게 까만 탓인지도 모른다. 특히 그중에서도 고물장수의 아들은 방금 굴뚝 속에서 기어 나온 꼴이었다. 동준이가 고물 장수 아들에게 뭐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깜장이 그 아이가 땅바닥에 양팔을 짚고 폴짝폴짝 개구리처럼 뛰기 시작했다. 동준이가 그 애 앞에다 뭘 던졌다. 그러고 보니 동준이 녀석은 쿠킨지 뭔지 하는 과자상자를 가슴에 끌어안고 있었다. 고물장수 아들이 땅에 떨어진 과자를 입으로 물어 올리더니 흙도 안 털고는 그대로 아삭아삭 씹어먹었다. 먹는 일이 끝나자 고물장수 아들은 하얗게 이빨을 드러내며 웃고는 다시 스타팅 블록에 들어선 것 같은 자세를 취했다. …동준이가 과자를 쥔 오른팔을 높이 올려 개울 쪽을 겨냥하고 힘껏 팔매질을 했다. 그러자 조금의 주저도 없이 고물장수 아들이 석축을 타고 제방 아래로 뽀르르 달려 내려갔다. 나는 그 개울에 관해서 일찍부터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공장에서 흘러 나오는 폐수와 집집마다 버리는 오물을 한데 모아 탄천으로 실어 나르는 거대한 하수도였다. ···마음 같아서는 고물장수 아들을 흠씻 두들겨주고 싶었는데 손이 자꾸만 내 자식놈 쪽으로 빗나갔다. 동준이 녀석을 한참 때리다가 퍼뜩 생각이 미쳐 뒤를 돌아다보니 고물장수 아들은 칙칙한 개울물을 따라 천방지축 과자상자를 쫓아가는 중이었다.

부자는 경멸해도 괜찮은 것이지만 빈자는 절대로 미워해서는 안 되는 대상이었다. 당연히 그래야만 옳은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론에 불과한 것이었다. 자기 자신을 상대로 사기를 치고 있는 것임을 나는 솔직히 자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의 분노란 대게 신문이나 방송에서 발단된 것이며 다방이나 술집 탁자 위에서 들먹이다 끝내는 정도였다. 나도 그랬다. 내 친구들도 그랬다. 껌팔이 아이들을 물리치는 한 방법으로 주머니 속에 비상용 껌 한두 개를 휴대해 다니기도 하고, 학생복 차림으로 볼펜이나 신문을 파는 아이들을 한목에 싸잡아 가짜 고학생이라고 간단히 단정해 버리기도 했다. 우리는 소주를 마시면서 양주를 마실 날을 꿈꾸고, 수십 통의 껌값을 팁으로 던지기도 하고, 버스를 타면서 택히 합승을, 합승을 하면서는 자가용을 굴릴 날을 기대했다. 램의 가슴을 배반하는 디킨스의 머리는 매우 완강한 것이었다. 우리는 눈과 귀와, 우리의 입과 손발 사이로 가로놓인 엄청난 괴리감을 우리로서는 사실 어쩔 수 없는 것이어서 도리어 나는 그날 밤새껏 램의 궁둥이를 걷어 차면서 잠을 온전히 설치고 말았다.

그가 허둥지둥 끌어안고 나가는 건 틀림없이 갈기갈기 찢어진 한 줌의 자존심을 것이다.

"이래봬도 나 대학까지 나온 사람이오."

누가 뭐라고 그랬나. 느닷없이 그는 자기 학력을 밝히더니만 대문을 열고는 보안등 하나 없는 칠흑의 어둠 저편으로 자진해서 삼켜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