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MARK/humanities

니체와 철학/질 들뢰즈

Jean Cocteau 2011. 6. 27. 00:34
 니체에게서 아주 빈번하게 등장하는 의문인 <의지는 무엇을 원하는가?>, <이 사람은 무엇을 원하고 저 사람은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의문을 그 의지를 위한 하나의 목적, 동기, 대상의 탐구처럼 이해해서는 안 된다. 하나의 의지가 원하는 바는 자신의 차이를 긍정하는 것이다. 다른 것과의 본질적인 관계 속에서 의지는 자신의 차이를 긍정의 대상으로 만든다. <자신이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는 기쁨>, 즉 차이의 향유, 바로 거기서, 경험주의는 변증법의 무거운 개념을, 특히 변증법주의자가 말하듯이 부정의 노동을 바로 공격적이며 경쾌한 새로운 개념적 요소로 대체한다. 변증법은 노동이고 경험주의는 향유라는 사실이 그것들의 특징을 층분히 나타내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노동>을 본성상 노예로 만드는 활동으로 간주했다. 그 활동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고, 생존 수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혼과 신체를 변질시키는 활동으로서의 노동은 노예의 몫이다. 노예는 자신이 하는 일 속에서 파멸한다. 인간은 못을 박기 위해서 만들어진 망치와는 다른 존재이다. 인간은 귀족적 활동에 종사함으로서 자신의 능력들을 동시에 발휘해야만 한다. 노동은 그 여러 능력들 가운데 하나를 도구화시키기에 그 조화를 파괴한다. 오늘날 노동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활동은 인간을 <살아 있는 도구>로 전락시키고 인간의 삶을 파괴한다. 그리스인이 비하시킨 노동이 어떻게 가치를 획득하게 되는 것일까? 기독교에서 노동은 신성한 처벌이다. 인간의 노동은 세계를 완전하게 만드는 데 기여하는 속죄의 수단이다. 따라서 그것은 악이라기 보다 <최소한의 악>이다. 프로테스탄트 윤리학은 바로 이 노동을 의무로 만든다. 그래서 노동의 도덕적 가치 평가가 자본주의의 비약적 발전과 관계를 갖게 된다. 19세기부터 산업화가 완성되는 시점에 노동은 철학 속에서 주요한 개념으로 자리잡게 된다. 특히 헤겔은 노동을 하나의 인간적 특질을 가진 개념으로 이해한다. 인간은 노동할 때만 인간일 수 있다. 이때 노동은 인간을 자연의 주인으로 그리고 자기 자신의 주인으로 만든다. 여기서 인간성을 생산하는 노동의 본질과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체계가 야기한 퇴행으로 고발하는 노동의 역사적 형태들(즉 소외, 노동력의 경제적 착취) 사이에는 분명한 간격이 존재한다. 니체는 기독교 도덕이 노동의 찬양을 통해서 가장 효과적으로 삶의 충동들을 길들이고 있다(노예화하고 있다)라고 분석한다.) 그리고 향유보다는 노동 속에 더 많은 사유가 존재한다고 우리에게 말하는 자는 누구인가? 차이는 본질로부터 분리할 수 없고, 현존을 구성하는, 실천적인 긍정의 대상이다. 니체의 <예>는 변증법의 <아니오>와, 긍정은 변증법적 부정과, 차이는 변증법적 모순과, 기쁨 및 향유는 변증법적 노동과, 가벼움 및 춤은 변증법적 무거움과, 기분 좋은 무책임성은 변증법적 책임성과 대립한다. 바로 거기에서 차이의 경험적인 감정, 간단히 말하자면 서열은 모순의 모든 사유보다 더 효과적이고 더 심오한 개념의 본질적인 동력이다.
 게다가 우리는 다음을 질문해야만 한다. 즉 변증법주의자 자신은 무엇을 원하는가? 변증법을 윈하는 그 의지는 무엇을 원하는가? 차이를 긍정하는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한 고갈된 힘, 더 이상 움직이진 않지만 자신을 지배하는 힘에 대한 반응은 하는 힘, 더 이상 움직이진 않지만 자신을 지배하는 힘에 대한 반응은 하는 힘, 그와 같은 힘만이 처음으로 다른 힘과의 관계 속에 부정적 요소를 지나가도록 하고, 자신이 아닌 모든 것을 부정하고, 그 부정을 자신의 고유한 본질과 자신의 현존의 원리로 만든다. <기ㅜ족의 도덕이 자기 자신의 성공적인 긍정에서 생겨나는 반면, 노예의 도덕은 처음부터 자신에게 속하지 않는 것, 자신과는 다른 것, 자신의 비-자아인 것에 대한 부정이다. 그리고 이 부정은 그의 창조적인 행위이다> 그래서 니체는 변증법을 평민의 사색으로, 노예의 사고 방식으로 제시한다. 즉 그때 모순의 추상적인 사고가 적극적 차이의 구체적 감정보다 우세하고, 반작용이 작용보다 우세하며, 복수 및 원한은 공격성을 대신한다. 그리고 니체는 반대로 주인에게서의 부정적인 것이 항상 자신의 현존에서 파생하는 부차적인 산물임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그 자체로 변증법적인 것은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아니다. 누가 변증법주의자인가, 누가 관계를 변증법화하는가? 그것은 노예이고, 노예의 관점이며, 노예의 관점에서의 사유이다. 주인-노예 관계의 그 유명한 변증법적인 측면은 사실상 다음과 같은 점에 의존하고 있다. 즉 권력이 거기서 권력의지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표상으로서, 우월성의 표상으로서, <어떤 이>에 의한 <다른 이>의 우월성에 대한 재인식으로 이해된다는 점이다. 헤겔에게서 의지들이 원하는 바는 그것들의 권력을 재인식하게 하고 그것들의 권력을 표상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니체에 따르자면, 권력의지와 그것의 본성에 대한 전적으로 그릇된 입장이 존재한다. 그런 입장은 노예의 것이며, 그것은 원한의 인간이 자신에게 만들어주는 권력의 이미지이다. 재인식의 대상, 표상의 재료, 경쟁의 목표로서만 권력을 이해하며, 따라서 투쟁이 끝난 후 권력을 단순히 기존 가치들에 결부시키는 것은 바로 노예이다.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모든 청년 헤겔주의자들에게 학파의 원형이나 상징같이 될 정도로, 쉽게 변증법적인 형태를 빌린다는 것은, 헤겔이 우리에게 제안하는 주인의 초상이 처음부터 노예에 의해서 만들어진 초상, 적어도 노예가 스스로 꿈꾸는 것과 같은 노예를 표현하는 초상, 즉 기껏해야 출세한 노예라는 이유에서이다. 주인의 헤겔적 이미지 아래서 간파되는 것이 바로 항상 노예이다.


그는 선량한가? 그는 악의가 있는가?
 바로 여기에 두 정식이 잇다. 나는 선량하다. 그러므로 너는 악의가 있다 Je suis bon, donc tu es mechant. 너는 악의가 있다. 그러므로 나는 선량하다 Tu es mechant, donc je suis bon. 우리는 비극화의 방법을 이용한다. 누가 그 정식들 중 하나를, 누가 또 다른 하나를 말하고 있는가? 그리고 각자 무엇을 원하는가? 그가 둘 다를 말하는 동일한 자일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 정식의 선량한 자는 분명 다른 정식의 악의가 있는 자일 것이기 때문이다. <선량함이란 개념은 단 하나가 아니다.> 선량하다, 악의가 있다라는 단어들은 여러 의미를 가지며, 그러므로라는 단어조차 그러하다. 사람들은 거기서 또 본질적으로 복수적이고 내재적인 비극화의 방법이 탐구에 그것의 규칙을 제공하고 있음을 확인할 것이다. 그 탐구는 그것에게 어떤 단어의 의미와 가치를 결정하도록 허용하고 그것을 기호론과 가치론으로 구성하는 과학적 규칙을 다른 곳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 우리는 <나는 선량하다>라고 말하면서 시작하는 자는 누구인지 묻는다. 물론 그는 다른 자들과 자신을 비교하는 자도, 자신의 행동들과 업적들은 우월하거나 초월적인 가치들과 비교하지도 않는 자이다. 왜냐하면 그런 자는 시작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선량하다>라고 말하는 자는 소위 선량하길 기대하지 않는다. 그는 행동하고 긍정하고 즐김에 따라, 그렇게 자신을 부르고, 명명하며, 그렇게 스스로에 대해 말한다. 선량함은 실행 속에서 체험된 행동, 긍정, 즐거움에 성질을 부여한다. 영혼의 어떤 성질, <어떤 영혼이 자기 자신에 대해 송하고 있는 어떤 근본적인 확실성, 추구할 수도, 발견할 수도, 상실항 수조차 없는 어떤 것을 부여한다.> 니체가 종종 품위라고 부르는 것은 사람들이 긍정하는 것(사람들이 그것을 추구할 필요는 없다)의, 사람들이 실행에 옮기는 것(사람들은 그것을 발견하지 못한다)의, 사람들이 즐기는 것(사람들은 그것을 상실할 수 없다)의 내적 특징이다. 긍정하고 행동하는 자는 동시에 존재하는 자이다. <esthlos란 단어는 그것의 어원에 의하면 존재하고 실재성을 가지며 실재적이고 참된 어떤 이를 의미힌다.> <그는 사물들에게 명예를 부여하고 자신이 가치들을 창조함을 의식한다. 그가 자기 속에서 발견하는 모든 것, 그는 그것을 높이 평가한다. 그 같은 도덕은 자기 자신에 대한 찬미 속에 있다. 그것은 충만의 감정, 넘치고자 하는 힘의 감정을, 내적인 강한 긴장의 행복을, 헌신하고 주고자 욕망하는 풍요에 대한 의식을 가장 중시한다.> <그들 자신은 선량한 자들이다. 말하자면 품위있는 인간들, 능력 있는 자들, 그들의 상황과 영혼의 고양에 의해서 우월한 자들이다. 바로 그들은 자기 자신을 선량한 자로 간주했으며, 그들의 행동들을 선량하다고, 말하자면 저속하고, 보잘것없으며, 천박한 모든 것에 대립시키면서 그 값을 책정하고 최고의 서열에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어떤 비교도 원리 속에 개입하지 않는다. 다른 자들이 긍정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으며, 즐기지 않음으로써 악의가 있다는 것은 단지 부차적 결과, 부정적 결론일 따름이다. 우선 선량함은 주인을 지시한다. 악의가 있음은 결과를 의미하고 노예를 지시한다. 악의가 있음은 부정적이고, 수동적이며, 나쁘고, 불행한 것이다. 니체는 전적으로 근본적이고 서정적인 긍정 위에서 구성된, 테오그니스라는 감탄할 만한 시에 대한 대략적인 논평을 하고 있다:즉 우리는 선량한 자들이고, 그들은 악의가 있고 나쁜 자들이다. 사람들이 귀족적 평가 속에서 최소한의 도덕적 뉘앙스를 찾는 것도 헛될 것이다. 힘들의 유형학인 어떤 유형학과 상응하는 방식들의 윤리학인 어떤 윤리학이 문제이다.
 <나는 선량하다. 그러므로 너는 악의가 있다.> 주인의 입에서 <그러므로>란 단어는 단지 부정적 결론을 도입할 따름이다. 부정적인 것은 결론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완전한 긍정의 결과로서 상정된다. <우리는 귀족이고 아름답고 행복하다.> 주인에게서 긍정적인 것은 전제 속에 있다. 그는 본질적이지도 거의 중요하지도 않은 부정적인 어떤 것의 결론에 이르기 위해서 행동과 긍정의 전제들과 그 전제들의 향유가 필요하다. 그것은 단지 <부차적인 것, 보완적 뉘앙스>일 따름이다. 그것의 유일한 중요성은 행동과 긍정의 농도를 증가시키는 것, 그것들의 동맹을 유착시키는 것, 그것들에 상응하는 즐거움을 배가시키는 것이다. 선량함은 <더 큰 기쁨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긍정하기 위해서만 자신의 정반대의 것을 찾는다.> 공격성의 위상은 그러하다. 그것은 부정적인 것이지만, 긍정적인 결론들의 결론으로서의 부정적인 것, 활동의 산물로서의 부정적인 것, 긍정하는 힘의 결론으로서의 부정적인 것이다. 주인은 하나의 부정을 만들기 위해서 두 개의 긍정 명제를 필요로 하며 최종적인 부정은 단지 전제들을 강화시키기 위한 수단일 뿐인 어떤 삼단 논법에서 자기를 재인식한다. <너는 악의가 있다. 그러므로 나는 선량하다.> 모든 것이 바뀌었다. 부정적인 것이 전제들 속을 지나간다. 긍정적인 것은 결론으로, 부정적 전제들의 결론으로 이해된다. 바로 부정적인 것이 본질적인 것을 구성하고 긍정적인 것은 부정에 의해서만 현존한다. 부정적인 것은 <원초적인 관념>, 시작, 특별한 행위가 되었다. 노예는 외관상 긍정적인 결론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반작용과 부정의 전제들, 원한과 허무주의의 전제들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또 그결론은 단지 긍정성의 외관만을 갖는다. 그래서 니체는 원한과 공격성을 구별하기를 몹시 바랐다. 그것들은 본성상 다르다. 원한의 인간은 비-자아를 구상하고 그 비-자아를 결국엔 자신으로 주장하기 위해서 그 비-자아에 대립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노예의 이상한 삼단 논법이다. 그는 긍정의 외관을 만들기 위해서 두 부정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이미 노예의 삼단 논법이 어떤 형태로 철학 속에서 그토록 성공을 거두었는지를 이해한다. 즉 변증법이다. 원한의 이데올로기로서의 변증법이다. 
 <너는 악의가 있다. 그러므로 나는 선량하다.> 이 정식 속에서는 바로 노예가 말하고 있다. 사람들은 거기에서도 가치들이 창조되어 있음을 부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얼마나 이상한 가치들인가! 사람들은 악의가 있는 다른 이를 싱정하면서 시작한다. 자신을 선량하다고 말한 자, 바로 그를 사람들이 악의가 있다고 한다. 그 악의가 있는 자는 행동하고 행동에 제동을 걸지 않는 자이다. 그래서 그것이 제3자들에게 초래할 결과들에 대한 관점에서 그 행동을 고려하지는 않는 자이다. 그리고 지금 선량한 자는 행동에 제동을 거는 자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소위 선량하다. 즉 그는 모든 행동을 행동하지 않는 자의 관점에, 그것의 결과들을 경험하는 자의 관점에, 그뿐 아니라 그것들의 의도들을 탐색하는 신적인 제3자의 가장 날카로운 관점에 결부시킨다는 점이다.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자는 누구든지, 아무에게도 무례하기 굴지 않고, 아무도 공격하지 않으며, 보복을 실행하지 않고, 신에게 복수를 위임하는 자는 누구든지, 우리처럼 자신을 감춘 채로 악과의 부딪치길 피하며, 게다가 우리처럼, 환자들, 겸손한 자들, 정의로운 자들처럼, 삶에서 별로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는 자는 누구든지 선량하다.> 여기서 선과 악이 태어난다. 윤리적 성향, 착함과 나쁨의 성향은 도덕적 판단에 의해 대체된다. 윤리학과 착함은 도덕의 악의가 있음이 되고 윤리학의 나쁨은 도덕의 선량함이 된다. 선과 악은 참함과 나쁨이 아니고 그와 반대로 그것들의 성향의 교환, 뒤집기, 전복이다. 니체는 다음의 점을 강조할 것이다. 즉 <신과 악을 넘어서>는 <착함과 나쁨을 넘어서>로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선과 악은 새로운 가치들이지만 그 가치들을 창조하는 방식 속에는 얼마나 이상한 것들이 있는가! 사람들은 착함과 나쁨을 전복하면서 그것들을 창조한다. 사람들은 행동하면서가 아니라 행동에 제동을 걸면서 그것들을 창조한다. 긍정하면서가 아니라 부정으로 시작하면서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들을 창조되지 않은 것, 신성한 것, 초월적인 것, 삶보다 우월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가치들이 숨기고 있는 것, 그것들의 창조 방식을 생각하자. 그것들은 극도의 증오, 삶에 대한 증오, 삶 속에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모든 것에 대한 증오를 숨기고 있다. 그 가치들이 그것들의 결론인 그 전제들에서 분리된다면, 단 한 순간도 살아남을 도덕적 가치는 없다. 그리고 더 깊이 있기 다루자면,그것들[종교적 가치들]이 결론을 이끌어내는 그런 증오와 복수심에서 분리된 종교적 가치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종교의 긍정성은 외적인 긍정성이다. 사람들은 강자들이 <악의가 있고>, <천벌을 받을> 자들이기 때문에, 불행한 자들, 가난한 자들, 약자들, 노예들이 선량하다고 결론짓는다. 사람들은 선량한 불행한 자, 선량한 약자를 만들어낸다. 강자들과 행복한 자들에 대한 복수보다 더한 복수는 없다. 그것에게 활기를 주고 그것을 인도하는 유태교의 원한의 힘 없이 기독교의 사랑이 무엇이겠는가? 기독교의 사랑은 유태교의 원한의 대립자가 아니라 그것의 결과, 그것의 결론, 그것의 완성이다. 종교는 다소간 그것들이 직접적으로 나온 원리들―즉 부정적 전제들의 무게, 복수심, 원한의 힘―을 감춘다(그런데 종종 위기의 시기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감추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