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MA/classical cinema
알파빌, Alphaville, Une Etrange Aventure De Lemmy Caution
Jean Cocteau
2011. 5. 20. 19:39
1965년 장 뤽 고다르 작
무언가를 설명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것이 특히 인생, 삶이라면 지금의 현실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래서 날카로운 지성은 자신을 스스로 비유함으로써 설명한다. 전설을 만들면 되는 것이다. 고다르는 알파빌이라는 전설의 도시를 만들었다. 그 도시의 슬로건은 'silence, logic, security, prudence' 다. 논리의 끝은 숫자로 귀결되는 수학적 공식이며 군중을 위한 무리의 신중함은 완벽한 침묵으로 일관한다. 감정은 돌발적 상황을 만들고 그래서 그들은 감정의 가장 위험한 신, 사랑을 믿지 않는다. 그래서 논리적 '속박'이 이루어지며 논리적 '종교'가 탄생한다. 알파빌의 군중은 말없이 보이지 않는 목표를 위해 나아간다. 진화된 인간을 꿈꾸며 단어를 없애는 것이다. 언어는 숫자가 아니어서 그 안에 수많은 역사가 쌓여가며 독특한 체계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역사의 광기는 돌발적 상황, 즉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결국 언어와 언어의 감정적 분출구인 오색찬란한 불꽃인 시는 필연적으로 감정의 신인 사랑을, 사랑한다. 그래서 '사랑한다'는 말은 가장 위험한 문장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때 컴퓨터는 '모든 사물은 언표됐으며, 단어는 사물과 그 자체 단어의 의미도 바꿀 수 없다'고 얘기한다. 그 뒤에는 '단어는 고립됐으며, 총체적인 의미를 잃는다' 말이 이어져 나온다. 논리적 구멍. 그렇다면 그들은 단어를 지울 필요가 없다. 언표를 뒤따라갈 때, 우리는 과거와 현재를 절대 떼놓을 수 없다. 그 공간적 장소를 떠날 때 언표된 단어란 모든 의미를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모든 의미를 잃어버린 단어를 왜 지워야 하는가? 왜 시를 없애야 하는가? 그것은 공간적 장소에 담긴 역사와 감정 때문이다. 그래서 언표에는 다양한 의미가 담겨 있으며 주체에 따라서 의미가 뒤바뀐다. 언표는 변화한다. 고립되지도 않았다. 만약 단어가 고립되었다면 그 순간부터 총체적인 의미를 잃을 텐데, 고정된 단어는 일의적 표현만을 담고 있을 뿐이므로 언표될 수 없다. 자신의 논리 속에 빠진 낡은 기계의 쇳소리. 때문에 더 큰 단어의 감옥 속에 갇힌 논리들. 쇳소리에 오염된 나탈리는 스스로 논리적 수수꼐끼에 몰락한 예쁜 '스핑크스'가 된다.
이런 편집증 환자 같은 논리적 사회는 과거를 지워나감으로써 현재만을 생각할 수 있다. 그들의 종교가 형체 없는 신에서, 인간의 진화로 뒤바뀌었을 때 인생은 이제 닫힌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인생은 끝없이 순환되는 것, 영원회귀야말로 최상의 논리 체계가 된다. 죽음으로써 증명하는 불사조의 삶을 사는데 도대체 사랑이 무엇이란 말인가. 단 하나의 눈빛, 입술, 기대어 울 수 있는 어깨 모두가 영원히 반복되는 것인데 누가 낭만을 찾을까? 다음 생에선 더 나은 나 자신을 바란다. 하물며 더 나은 이성을 바라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하지만 '아웃랜드'에서 온 래미는 그렇지 않다. 그의 인생은 원의 형태가 아닌 직선적이다. 그는 끊임없이 사진을 찍으며 과거이자 순간을 뒤쫓고 열정적으로 탐미한다. 때문에 그는 추상적인 '이상, 빛, 구원자'를 쫓지 않는다. 그는 스스로 조명을 흔듬으로써 느와르 효과를 만들고 행동으로 나타내는 자다. 때문에 여자와 돈을 가장 좋아하며 총이야말로 불운에 대응하는 유일한 무기가 되는 것이다. 그의 인생은 죽으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음으로. 무엇이나 하나 이상은 존재하지 않는 세상 누군가는 역설적으로 말하지 않았던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 그의 슬픈 존재 형식, 외롭고 낭만적인 사랑의 결말. 불사조의 죽음을 원하는가, 비극적 낭만을 원하는가. 알아서 자기 입맛대로 골라 잡으면 된다. 어느 쪽이든 부디 그 곳에서 공허와 허무를 발견하지 않기를 바라며. 어찌됐든 나탈리는 대답한다.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스핑크스가 아닌 스핑크스 수수께끼의 인간이 되기로. 그래서 사랑하기로, 유치해지기로, 눈물 흘리기로, 말하기로.
★★★★
무언가를 설명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것이 특히 인생, 삶이라면 지금의 현실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래서 날카로운 지성은 자신을 스스로 비유함으로써 설명한다. 전설을 만들면 되는 것이다. 고다르는 알파빌이라는 전설의 도시를 만들었다. 그 도시의 슬로건은 'silence, logic, security, prudence' 다. 논리의 끝은 숫자로 귀결되는 수학적 공식이며 군중을 위한 무리의 신중함은 완벽한 침묵으로 일관한다. 감정은 돌발적 상황을 만들고 그래서 그들은 감정의 가장 위험한 신, 사랑을 믿지 않는다. 그래서 논리적 '속박'이 이루어지며 논리적 '종교'가 탄생한다. 알파빌의 군중은 말없이 보이지 않는 목표를 위해 나아간다. 진화된 인간을 꿈꾸며 단어를 없애는 것이다. 언어는 숫자가 아니어서 그 안에 수많은 역사가 쌓여가며 독특한 체계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역사의 광기는 돌발적 상황, 즉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결국 언어와 언어의 감정적 분출구인 오색찬란한 불꽃인 시는 필연적으로 감정의 신인 사랑을, 사랑한다. 그래서 '사랑한다'는 말은 가장 위험한 문장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때 컴퓨터는 '모든 사물은 언표됐으며, 단어는 사물과 그 자체 단어의 의미도 바꿀 수 없다'고 얘기한다. 그 뒤에는 '단어는 고립됐으며, 총체적인 의미를 잃는다' 말이 이어져 나온다. 논리적 구멍. 그렇다면 그들은 단어를 지울 필요가 없다. 언표를 뒤따라갈 때, 우리는 과거와 현재를 절대 떼놓을 수 없다. 그 공간적 장소를 떠날 때 언표된 단어란 모든 의미를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모든 의미를 잃어버린 단어를 왜 지워야 하는가? 왜 시를 없애야 하는가? 그것은 공간적 장소에 담긴 역사와 감정 때문이다. 그래서 언표에는 다양한 의미가 담겨 있으며 주체에 따라서 의미가 뒤바뀐다. 언표는 변화한다. 고립되지도 않았다. 만약 단어가 고립되었다면 그 순간부터 총체적인 의미를 잃을 텐데, 고정된 단어는 일의적 표현만을 담고 있을 뿐이므로 언표될 수 없다. 자신의 논리 속에 빠진 낡은 기계의 쇳소리. 때문에 더 큰 단어의 감옥 속에 갇힌 논리들. 쇳소리에 오염된 나탈리는 스스로 논리적 수수꼐끼에 몰락한 예쁜 '스핑크스'가 된다.
이런 편집증 환자 같은 논리적 사회는 과거를 지워나감으로써 현재만을 생각할 수 있다. 그들의 종교가 형체 없는 신에서, 인간의 진화로 뒤바뀌었을 때 인생은 이제 닫힌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인생은 끝없이 순환되는 것, 영원회귀야말로 최상의 논리 체계가 된다. 죽음으로써 증명하는 불사조의 삶을 사는데 도대체 사랑이 무엇이란 말인가. 단 하나의 눈빛, 입술, 기대어 울 수 있는 어깨 모두가 영원히 반복되는 것인데 누가 낭만을 찾을까? 다음 생에선 더 나은 나 자신을 바란다. 하물며 더 나은 이성을 바라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하지만 '아웃랜드'에서 온 래미는 그렇지 않다. 그의 인생은 원의 형태가 아닌 직선적이다. 그는 끊임없이 사진을 찍으며 과거이자 순간을 뒤쫓고 열정적으로 탐미한다. 때문에 그는 추상적인 '이상, 빛, 구원자'를 쫓지 않는다. 그는 스스로 조명을 흔듬으로써 느와르 효과를 만들고 행동으로 나타내는 자다. 때문에 여자와 돈을 가장 좋아하며 총이야말로 불운에 대응하는 유일한 무기가 되는 것이다. 그의 인생은 죽으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음으로. 무엇이나 하나 이상은 존재하지 않는 세상 누군가는 역설적으로 말하지 않았던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 그의 슬픈 존재 형식, 외롭고 낭만적인 사랑의 결말. 불사조의 죽음을 원하는가, 비극적 낭만을 원하는가. 알아서 자기 입맛대로 골라 잡으면 된다. 어느 쪽이든 부디 그 곳에서 공허와 허무를 발견하지 않기를 바라며. 어찌됐든 나탈리는 대답한다.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스핑크스가 아닌 스핑크스 수수께끼의 인간이 되기로. 그래서 사랑하기로, 유치해지기로, 눈물 흘리기로, 말하기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