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MARK/humanities

니체/뤼디거 자프란스키

Jean Cocteau 2011. 5. 6. 13:50
 1870년 초여름에 니체에게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는데 (…) 문화의 양극에 있는 힘의 상호 작용에 관한 것이며, 니체는 이 양극을 신의 이름을 빌려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라고 명명한다. 1870년 여름에 쓴 논문 <디오니소스적인 세계관>을 쓰면서 그는 처음으로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의 상대적인 성격을 그리스 비극의 이해를 위해서 사용한다.
 위에 언급한 두 개의 강연에서 전개된 논리를 바탕으로 그는 이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의 상대성의 발견에 가까이 이르게 된다. 첫 강연의 내용은 비극의 기원이 디오니소스 축제라는 것이었으며, 두 번째 강연에서 그는 소크라테스의 아폴론적인 명확함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이 두 이론을 근거로 그는 이제 비극은 이 두 충동의 화해라고 설명한다. 고뇌와 음악은 디오니소스적이며, 무대에서의 언어와 수사학적 논증술은 아폴론적이다. 이 두 양그으로부터 어두운 운명의 힘에 관한 깨어 있는 의식의 묘사가 나오게 된다.
 니체는 처음에 아폴론적이고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예술적인 스타일로 이해했다. 아폴론은 형식, 분명함, 확고한 윤곽, 어둡지 않은 꿈, 그리고 무엇보다도 타인과 구별되는 개성을 주관하는 신이다. 조각, 건축, 호메로스적인 신들의 세계, 서사시에 나타나는 정신, 이 모든 것들이 바로 아폴론적이다. 반면에 디오니소스는 해체, 열광, 황홀, 광란을 주관하는 사나운 신이다. 특히 음악과 춤은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가장 잘 나타나는 예술 형식이다. 아폴론적인 예술의 매력은 늘 엄격한 인공적 형태를 유지하는 것이며, 이때에 의식은 늘 치우치지 않고 깨어 있다. 반면에 디오니소스적인 예술에서는 한계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유동적이다. 음악이나 춤, 혹은 다른 예술에 사로잡힌 사람은 절도를 잃게 된다. 이렇게 예술에 도취한 상태에서는 자신이 도취했다는 의식도 사라진다. 디오니소스적인 열광에 사로잡힌 사람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지 않는다. 하지만 아폴론적 예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늘 반성적이며 어떠한 일에도 완전히 빠지지 않고 자신의 예술적 열정을 즐긴다. 아폴론적인 인간은 타인과 구별되는 자신의 개성을 중시하며, 디오니소스적인 인간은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시도를 한다.
 이처럼 미적 원칙의 분석에서 시작된 니체의 시도는 점차 인간 존재에 관한 형이상항적인 대담한 스케치로 발전된다. 여기에서 쇼펜하우어 철학의 영향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즉 그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본능적 의지의 세계에 속한 것으로, 아폴론적인 것은 깨어 있는 표상의 세계에 속한 것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구분을 통해서 쇼펜하우어 철학에 몰두했던 니체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가장 원초적이고 기본적인 삶의 의지를 의미할 뿐 아니라 더 아나가서 디오니소스적 삶은 창조적이지만 동시에 고통스러운 무질서를 의미한다고 보았다. 이것은 쇼페하우어가 의지의 세계를 창조적이면서 동시에 고통스러운 무질서의 세계로 본 것과 마찬가지이다.
 아폴론적이고 디오니소스적이라는 예쑬적 양식을 이용해서 서로 다른 삶의 형이상학적인 힘을 구분한 니체는 1870년 여름 자신의 지적발달에서 가장 결정적인 도약을 한다.(…) 우리를 유혹하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세 가지 측면에서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다. 즉 세 가지 측면에서의 개인화 원칙의 극복이다. 첫째 인간이라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 자연으로 돌아가 자연과 일체감을 갖는 것이다. 광란의 축제나 사랑, 혹은 군중들과 도취되면서 느끼는 주변 사람들과의 일체감을 통해 개인의 한계를 넘는 것이 두 번째이다. 세 번째는 자신의 내면의 벽을 허무는 것인데, 이로써 의식은 무의식에게 자신의 문을 열게 된다. 하지만 겁을 내며 자신의 좁은 정체성에 자신을 가두려는 사람은 이러한 세 가지 측면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을 위협으로 느끼게 된다. 이와는 반대로 기분 좋게 자신의 추락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 바로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다.


 전체 자연이 인간의 내부로 들어와서 우리 인간에게 말하는 것은, 이 자연이 동물적 삶의 저주로부터 해방되는 데 바로 우리 인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며, 또한 우리 현존재는 자신의 내부에 하나의 거울을 갖고 있는데, 이 거울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삶이 더 이상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형이상항적 중요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형이상한적 중요성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 중요성이라는 것이 사물들을 통해서 나타나는 세상의 조화나 형이상학적인 질서, 혹은 정당성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형이상학적 중요성은 오직 의식에 의해서 깨어 있는 삶에서 자연이 유일무이한 질적인 변화, 그것도 아주 기쁨이 가득한 질적인 변화를 한다는 사실에 있다. 니체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의미심장하게 말한다. 자연은 자신이 어떤 목적을 갖고 있고, 또한 삶과 생성의 유희를 지나칠 정도로 충만하게 경험했다는 것을 잊어버렸다고 의식할 때에 비로소 자신의 최종 목적지에 도달한 것이다. 오해할 소지가 있는 말이다. 니체는 자연이 주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즉 자연은 그 무엇을 배우거나 잊어버리거나 혹은 능동적으로 신나는 유희를 경험할 수 없다. 그는 자연에 어떤 신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자연이 무엇을 배운다거나 잊어버린다고 말하는 것은 자연적 존재인 인간의 의식의 반성을 뜻하는 것이다. 즉 인간 내부에서 스스로 의식되는 자연을 의미한다. 인간의 의식 속에서 자연은 목적 지향적인 욕망으로 나타나는데, 이 욕망은 결코 만족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자신이 목표했던 목적지에 도달하자마자 그는 자신이 원했던 것이 이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목적지에 도달하려는 욕망을 계속 갖고 자신을 유지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의식이 이 욕망에게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거울을 주게 될 때 비로소 이 욕망을 멈출 수가 있다. 지치거나 회의해서가 아니라 그 어떤 최정의 목적지도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인간은 늘 이미 목적지에 도달해 있는 것이다. 욕망이 충족된 순간이 그 어떤 미래에도 없으며, 이러한 순간은 늘 현재에 와 있다. 늘 현재를의식하는 것을 배우면서 인간은 이러한 충족된 순간에 도달할 수가 있다. 의심스런 미래를 염두에 두지 말고 현재에 충실하면서 우리는 삶의 유희를 충만하게 체험한다. 우리가 삶을 만끽할 수 있는 것은 이런 과정을 통한 것이지, 삶이 스스로 체험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삶의 방향은 직선적으로 쌓여가거나 점차적으로 상승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과 생성의 순환이다. 이 순환 위의 모든 점은 중심점에서 같은 거리만큼 떨어져 있다. 그러므로 삶은 늘 목적지에 도달해 있거나 아니면 늘 같은 거리만큼 목적지에서 떨어져 있다. 만일 자연이 이러한 목적지에 대한 환상을 극복했다면 자연은 인간 속에서 기쁨이 가득한 질적 변화를 한 것이다. 늘 의식하면서 깨어 있는 인간은 바로 자기 자신이 목적지이며, 자기 자신이 욕망이 충족되는 그 순간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인간 속에서 자연은 이러한 인식을 통해서 미화되어 나타난다. 이러한 신비스러운, 그 어떤 자극없이도 생겨나는 활동을 니체는 위대한 계몽이라고 부르며, 바로 이를 통해서 현실 세계는 외적 아름다움을 갖게 된다.


 니체는 독특한 종교적인 감정을 특히 많이 갖고 있는 성인, 순교자, 그리고 금욕주의자들의 심리학으로 옴겨간다. 이러한 위대한 종교인들에게서 나타나는 것은 자기 상승의 위대한 힘과 종교적인 감정 속에 있는 기쁨이 넘치는 에너지이다. 이들에게서는 저급하고 위축된 기분이나 비하, 겸손함은 찾아볼 수가 없다. 이 성인들과 금욕주의자들은 자신을 저열하고 상스럽다고 여기는 내부의 또 다른 자신과 투쟁한다. 이들은 동시에 두 측면에 대항해서 싸운다. 하나는 열등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열등한 것을 극복하는 것이다. 즉 그들은 저질스러운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서 싸우고 다른 한편으로는 고귀한 것을 얻으려고 싸운다. 또한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싸우고 정신을 얻어서 힘을 얻으려고 싸운다. 내적으로 부자인 사람은 거울로 둘러싸인 방에 산다. 그가 맑은 거울을 통해서, 신의 모습을 토해서 보면 자신의 본질은 탁하고 기이하게 찌그러져 보인다. 그가 명상하는 순간에 그는 저 맑은 거울이 바로 확대된 자아인 것을 알게 되며, 또한 신의 거울을 통해서 자신의 더 나은 가능성을 바라보고, 이를 통해서 자신이 승화됙 겸손해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러한 거울 보기를 통해서 자아의 분열이 이루어지고, 이를 통해서 인간은 도덕적인 존재도 되고 종교적인 존재도 된다. 종교적인 자아 분열을 통해서 인간은 극단적으로 자기를 헌신하기도 한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것은 인간은 자기 자신에 속한 것, 예를 들면 사고나 바람 혹은 생산물을 자기 자신에게 속한 다른 것보다 더 사랑하기 때문이며, 이를 통해서 인간은 자기의 존재를 분열시켜서 한 부분이 다른 부분에 봉사하게 만든다. 이렇게 금욕주의자나 성인, 그리고 순교자들은 자기 자신에게로 들어가서 겸손함 속에서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승리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신의 파괴, 자신의 천성에 대한 경멸, (…) 이러한 것을 가지고 종교는 많은 일을 했다. 이렇게 자기 비하가 일어나는 이유는 내적으로 심히 공허하기 때문이다. 산상수훈의 전체 도덕이 여기에 속한다. 과도한 것을 요구하면서 자신을 박해하고, 이렇게 억지를 써가면서 요구한 것을 나중에 마음속으로 숭배하는 것, 바로 이러한 일에 인간은 희열을 느낀다. 모든 금욕적인 도덕에서 인간은 늘 자기 자신의 한 부분을 신으로 숭배하므로 자기 자신의 다른 부분을 악마로 만드는 것은 필연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