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MARK/humanities

사진에 관하여/수전 손택

Jean Cocteau 2011. 4. 14. 16:27
 사진은 더 이상 실재하지 않는 과거를 상상적으로 소유할 수 있도록 해줬고, 사람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공간까지 갈 수 있도록 해줬다. 사진이 현대의 가장 독특한 활동, 즉 관광과 나란히 발전한 것도 그래서이다. 현대가 시작되자 평소의 생활 공간을 떠나 정기적으로 짧게 여행을 떠나면서 카메라를 갖고 가지 않는다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은 일처럼 여겨졌다. 사진이야말로 자싱니 진짜로 여행을 떠났고, 일정대로 잘 지냈으며, 정말 즐거웠다는 점을 확실히 증명해줄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사진은 가족, 친구, 이웃이 볼 수 없는 곳에서 이뤄진 일련의 소비 활동을 기록해 준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이보다 훨씬 더 많이 여행을 다니게 됐어도 자신의 경험을 생생한 것으로 만들어 주는 장치, 즉 카메라에 의존하는 태도는 좀체 수그러들지 않았다. 앨버트 나일강을 보트로 여행하거나 14일간 중국을 유람하는 등 전 세계 곳곳을 돌며 일종의 전리품처럼 사진을 찍어 모아오는 사람들은 물론, 휴가 중에 에펠탑이나 나이아가라 폭포 사진을 찍어오는 중하층 사람들도 한결같이 갖고 있는 욕구, 바로 이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것이 사진이다.
 이처럼 사진은 경험을 증명해 주는 방법이기도 하지만, 경험을 거부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사진으로 찍기 좋은 것들을 찾아다니는 일말을 경험이라고 생각하게 되거나 경험을 일종의 이미지, 일종의 기념품과 맞바꿔버리려고 하게 되니 말이다. 그러니까 여행이 고작 사진을 모으는 수단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사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여행 도중 흔히 격해질지도 모를 혼란스러움을 진정시켜 주고 완하시켜 주는 활동이다. 여행객들은 카메라를 꼭 들고 가야 된다고 생각하며, 여행 중 마주치는 것에는 모두 주목하려고 한다. 그래서 앞뒤 재지 않고 사진을 찍어댄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경험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이다. 멈춘다,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다른 곳으로 간다. (…) 사진을 찍는다는 것 자체도 사건인데, 그것도 사진을 찍는 사람이 절대적인 권리를 갖고 일으키는 사건인 것이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을 간섭하거나 침해할 수 있으며, 혹은 무시할 수도 있는 그런 권리를 갖고 말이다. 오늘날에는 카메라의 개입이 있어야 상황을 정확히 인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곳곳에 널려 있는 카메라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이 흥미로운 사건들, 그래서 사진에 담길 만한 가치가 있는 사건들로 이뤄져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그래서 일단 어떤 사건이 벌어졌다면 그 사건이 도덕적으로 옳건 그르건 간에 그 자체로 완결되어야 한다는 생각―그러니까 그 무엇, 즉[그 사건을 기록한] 사진이 이 세상에 나와야 한다는 생각이 쉽게 생기게 됐다. 사진은 사건이 끝난 뒤에도 계속 남아 있으리라. 일종의 불멸성(그리고 중요성)을 그 사건에 부여해 주면서. 사진에 담기지 못했는데도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는 사건은 별로 없다. 살아 있는 사람들이 카메라 밖에서 자기 자신이나 살아 있는 다른 사람들을 죽일 때에도 사진작가는 카메라 뒤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또 다른 세계, 즉 우리 모두를 훨씬 오래 살게 해줄 이미지-세계의 파편들을 만들어 내려면 말이다.
 원래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상황에 개입하지 않는 활동이다. 가솔린 통에 다가가는 베트남 승려, 몸통에 양팔이 묶인 이적 행위자를 총검으로 찌르는 벵골의 게릴라 사진 등 인상적일 만큼 대성공을 거둔 동시대 포토저널리즘이 공포감을 자아내는 이유는 부분적으로 사진작가들이 다음과 같은 인식, 즉 사진이냐 살아 있는 피사체냐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사진을 선택하는 것도 타당하다는 인식을 갖게 됐기 때문이다. 상황에 개입하면 기록할 수 없고, 기록하면 상황에 개입할 수 없다. 지가 베르토프의 위대한 영화『카메라를 든 사나이』는 사진작가의 이상적인 이미지를 보여줬다. 쉴새없이 움직이는 사람, 즉 주마등 같이 펼쳐지는 갖가지 사건 속으로 개입해야겠다는 생각이 생길 수 없을 만큼 민첩하고 빠르게 뛰어드는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사진작가라고. 히치콕의 영화『이창』(1954)은 사진작가의 이런 이미지를 보완해 준다. 제임스 스튜어트가 연기했던 어느 사진작가는 한 사건에 깊숙이 연루된다. 그것도 카메라를 통해서.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다리가 부러져 휠체어 신세를 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당분간 움직일 수 없는 처지였기에 그는 자신이 목격한 일에 대해 아무런 행동을 취할 수 없었고, 그래서 그에게는 사진을 찍어옪는 것만이 의미가 있었다. 비록 몸으로 사건에 개입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카메라를 사용함으로써 사건에 연루된다. 카메라는 일종의 관측소에 불과할지 모르나, 사진을 찍는 행위는 남을 훔쳐보며 성욕을 느끼는 관음증처럼 때로는 은밀하게 때로는 노골적으로, 현재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더욱 부추기는 방법이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대상 그 자체, (적어도 '멋진'사진을 찍을 때까지라도)지금 모습 그대로 변함 없이 존재하는 대상에 관심을 기울이는 행위이며, 사진으로 찍어놓아야 할 만큼 그 피사체를 흥미롭게 만들어주는 그 무엇인가(예컨데 남에게는 고통이나 불행이더라도 내게는 흥미로움을 주는 상황)와 공모하는 행위인 것이다.
(…)엄밀히 말해서, 단 한 장의 사진으로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 물론 사진은 우리의 정신에 새겨져있는 현재와 과거의 상에 뚫린 공백을 메워주기도 한다. 가령 제이콥리스가 보여준 1880년대 뉴욕의 비열한 모습은, 19세기 말 미국 대도시에 만연한 빈곤이 디킨스가 묘사한 것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시사적이다. 그러나 카메라에 찍힌 현실에는 드러난 것 이상으로 은폐된 것도 많기 마련이다. 브레히트의 지적처럼, 크루프사의 공장 사진은 이 공장에 대해서 실질적으로 아무것도 말해주는 바가 없다. 무엇인가와 애정 관계를 맺을 때에는 그것의 외양을 보게 되지만, 무엇인가를 이해하려면 그것의 기능을 봐야 하는 법이다. 그리고 기능이라는 것은 시간 속에서 제 모습을 드러내기에, 시간 속에서 설명되어야 한다. 우리에게 뭔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만이 우리에게 이해될 수 있는 법이니.
 사진을 통해서 얻게 된 이 세계에 관한 지식은 양심을 자극할 수는 있을지언정, 결코 윤리적이거나 정치적인 지식이 될 수는 없다는 한계를 안고 있다. 스틸 사진을 통해서 얻게 된 지식은 냉소적이든 인간적이든 감상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 지식은 싸구려 지식, 즉 가짜 지식이자 가짜 지혜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진을 통해서 현실을 확인하고 사진을 통해서 경험을 고양하려는 욕구, 그것은 오늘날의 모든 이들이 중독되어 있는 심미적 소비주의의 일종이다. 산업화된 사회는 시민들을 이미지 중독자로 만들어 버린다. 이것이야말로 불가항력적인 정신적 오염이다. 아름다움, 표면 아래에서 무엇인가를 찾아내려는 목적, 이 세계를 구원하고 찬양하려는 태도 등을 절절히 갈망한다는 것―우리는 사진을 찍는 기쁨 속에서 에로틱하기 그지없는 이런 감정을 늘 확인하는 것이다. 물론 감정을 비교적 덜 드러내는 사진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사람들이 사진에 강박감을 갖고 있다는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경험한다는 것을 바라본다는 것으로 자꾸 축소하려 한다. 결국 오늘 날에는 경험한다는 것이 그 경험을 사진으로 찍는다는 것과 똑같아져 버렸고, 공개 행사에 참여한다는 것이 그 행사를 사진으로 본다는 것과 점점 더 비슷해져 버렸다. 19세기의 가장 논리적인 유미주의자였던 말라르메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결국 책에 씌어지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오늘날에는 모든 것들이 결국 사진에 찍히기 위해서 존재하게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