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브르 사 비, Vivre Sa Vie: Film En Douze Tableaux
1962년 장 뤽 고다르 작
오프닝 크레딧에서 주인공의 이름이 나나인 것을 보았을 때 처음에는 anna(안나 까리나)의 말장난같이 들렸다. 하지만 여인 나나를 얘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역시 에밀 졸라의 소설 <나나>다. 소설 <나나>의 주인공은 배우이자(그것도 엄청 끔찍한) 매춘부다. 비브르 사 비의 나나 또한 배우이자 매춘부가 된다. 하지만 비브르 사 비에서 나나가 연기하는 모습을 본 적은 없으니 그녀의 인생이 끔찍한 재능 덕분인지 아님 말 그대로 재수가 없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장 뤽 고다르가 보여주는 것은 삶을 영위해나갈 수 없는 나나의 현실이고 그에 아무런 당위성도 부여해주지 않는다. 나나는 단지 거처를 구할 수 없을 정도의 궁핍을 경험하고 있었고, '잔 다르크의 수난'을 보며 15세기 프랑스 여인의 수난을 앵무새처럼 경험했으며, 얼굴이 예뻤다. 그래서 그녀는 카메라를 응시한다. 그 눈빛은 "이 사람 진짜 말 많지 않아요?" 아니면 "아, 이 영화 지루하네." 혹은 "남자는 남자고, 인생은 인생이고, 영화는 영화다"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고다르는 관객들이 자신의 영화에 '드라마적으로 푹 빠져드는 것'을 용인할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감정을 끊어내 듯 툭툭 던져놓는 것들이 많다. 무성 영화는 음성이 없어 보통 영화 내내 두 가지의 동일한 곡조가 상황에 따라 뒤바뀌며 FIN(또는 END, 끝)라고 외치지 않는 한 끊임없이 반복된다. 그것은 관객이 드라마에 빠져들 수 있도록 음조를 친숙하게 만들며 웃게 혹은 울도록 유도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장 뤽 고다르는 나나가 보고 있던 '잔 다르크의 수난'에서 모든 음악을 빼버렸다. 단지 극단적으로 클로즈업된 배우 잔다르크의 큰 눈망울과 활자로 쓰여진 대사만이 있을 뿐이다. 나는 '잔 다르크의 수난'을 보았기에 나나의 슬픔에 공감할 수 있었겠지만 사실 그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깨나 슬픈 장면인가 보다. 비브르 사 비의 여자 주인공인 나나가 저 영화를 보며 울고 있군. 근데 안나 까리나 정말 예쁘다.' 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가장 드라마적인 영화에 감성을 빼앗아 버렸다. 덕분에 나나의 슬픔까지 영화를 위한 연기라는 게 들통 난다. 고다르의 방해는 계속해서 이어진다. 음악을 의도적으로 툭 끊어버리고, 카페에서 마담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나나와 그녀에게 다가온 라울이 대화하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라울의 머리가 나나의 얼굴을 가리도록 약올리듯 동선을 바꾼다. 말하고 있는 연기자의 얼굴을 가려버려서 도대체 무슨 표정으로 연기하는지 알 수가 없다. 나나는 앵무새처럼 상대방의 대사를 따라 하거나 아귀에 맞지 않는 대답을 한다. 매춘부라는 역할의 옷을 입었지만 '나는 존재한다'는 실제의 여자이기도 하다.
고다르가 어째서 나나라는 이름을 골라 매춘부의 역할을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아마 그가 하고 싶었던 말들은 11장에서 나나와 학자의 만남에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 있을 것이다. 고다르의 영화를 볼 때마다 항상 생각하는 것인데 주인공들이 "너무 말이 많다". 11장의 대화 내용도 말에 대한 것인데 일부는 고다르가 왜 그렇게 말이 많은지에 대한 변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나는 말이 너무 많으면 그 의미를 잃는다고 이야기하며 자기는 말을 하는 것이 싫다고 한다. 그러자 학자는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보다 남을 더 사랑할 때나 가능할 텐데 그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정말로, 그렇다. 고다르의 나나는 절망 속에서도 꿈을 꾸고 사랑을 하는 이상주의자일 수도 있다. 매춘부라는 직업은 여자가 가질 수 있는 가장 끔찍한 경험의 끝자락이다. 그 지점에서 나나는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라울에게서 빠져나오려던 노력은 '남을 자기보다 더 사랑했기에'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자의 주변 환경은 그녀가 살아야 할 삶을 살아(비브르 사 비)가도록 인생을 탐구할 수 없게 만든다. 그러자 영화는 갑자기 그녀의 사랑을 운명론적으로 끝장내 버린다. 여기서 비로소 비브르 사 비는 영화가 된다. 그리도 싫어하던 감성적인 영화를 흉내내는 것이다. 줄 앤 짐처럼. 끊임없는 객관의 연속 후에 갑자기 던져진 비극에 관객은 속수무책이 된다. 그리고 우리는 거기서 안나 까리나의 아름다움을 깨닫는다. 고다르의 나나는, 매춘부 나나는, 앵무새의 나나는, 측면에서의 그 곧은 아름다움과 순수함이 깃든 나나는, 정면에서의 도발적인 눈빛의 나나는, 안나 까리나가 가지고 있는 모든 아름다움을 담아낼 수 있는 최적의 역할이었다. 그것이었다. 고다르가 왜 나나에게 매춘부의 역할을 맡겨놓았는지. 그것은 절망을 담고 있는 단어로 고다르가 말하고 싶었던 사회적 메타포와 그의 뮤즈 안나 까리나의 아름다움을 담을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옷이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