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MARK/humanities

비물질 노동과 다중/자율평론

Jean Cocteau 2011. 2. 12. 22:01
<질 들뢰즈> 정동이란 무엇인가?
 [스피노자에게서] 한 사람의 꼬마 데카르트를 상기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보기에, 이것은 기본적으로 반데카르트적 명제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물 그 자체를 사고하는 것에 대한 모든 견해를 배제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코기토의 모든 가능성을 배제합니다. 나는 오직 신체들의 혼합물들을 알 뿐이며, 나에게 가해지는 다른 신체들의 작용에 의해서, 혼합물들에 의해서 내 자신을 알 뿐입니다.
 이것은 반데카르트주의적일 뿐만 아니라 반기독교적이기도 한데, 왜 그럴까요? 신학의 근본적인 논점들 중의 하나는 최초로 창조된 인간의 직접적인 완전성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신학에서 아담의 완전성 이론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죄를 범하기 전에 아담은 가능한한 완전하게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그의 죄의 이야기는 정확히 인간의 타락의 이야기가 됩니다. 하지만 인간의 타락은 그가 창조된 것인 한에 있어서 완전한 아담을 전제로 합니다. 스피노자는 이러한 관념이 매우 재미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의 생각은 이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만일 최초의 사람이라는 관념이 주어진다면, 이러한 관념은 가장 무력한 존재라는 관념으로 주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최초의 사람이란 우연한 마주침 속에서, 그리고 그 자신의 신체에 가해지는 다른 신체들의 작용 안에서 존재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거기에는 가장 불완전한 것이 존재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아담이 존재한다는 가정 안에서는, 그는 절대적인 불완전성과 부적실성의 양태로 존재합니다. 그는 완전히 우연한 만남들에 빠지는 어린 아기의 양태로 존재합니다. 만일 그가 보호 환경 속에 있지 않다면 말입니다.

 미워하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알다시피 슬픔에 대해서 스피노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행동 능력이 감소한다. 그러면 여러분은 그 능력, 여러분의 행동 능력이 감소하는 한 슬픔을 명험한다, 맞습니다. 나는 그것이 밉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그것의 관계들이 여러분의 관계들과 합성되지 않는 사물과 여러분이 승강이를 벌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이 마음에 두고 있는 것 [바로] 그것일 뿐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파괴하려고 애씁니다. 미워한다는 것은 여러분을 파괴하기 위해 위협하는 것을 파괴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미움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다시 말해 여러분을 해체하려고 위협하는 것을 해체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슬픔은 미움을 낳습니다. 그것이 기쁨 역시 낳는다는 것을 주의하십시오. 미움은 기쁨을 낳습니다. 그래서 두 개의 계보―하나는 슬픔, 하나는 기쁨―는 순수한 계보가 되려고 하지 않습니다. 미움의 기쁨이란 무엇일까요? 미움의 기쁨이 존재합니다.
 스피노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불행해지는 것을 미워하는[불행해지기를 원치 않는] 존재를 상상한다면, 여러분의 마음은 묘한 기쁨을 경험합니다. 어떤 미움은 수동[정념]들을 낳을 수조차 있습니다. 그리고 스피노자는 이것을 훌륭하게 해냅니다. 미움의 기쁨들이 존재합니다.이러한 기쁨들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어쨌든 이러한 기쁨들이 묘하게 보충적이라고, 즉 간접적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나중을 위해 많이 나아가게 해줄 것입니다. 우선 미움 속에 있는 슬픔을 찾게 됩니다. 다시 말해 여러분의 행동 능력은 방해받고 감소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비록 여러분이 사악한[잔인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이 마음이 미움의 기쁨들 속에서 활개친다는 것을 믿을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미움의 기쁨들은, 그것들이 거대한 만큼, 여러분이 그 일부를 이루는 불쾌한 작은 슬픔을 결코 제거하지 못할 것입니다. 여려분의 기쁨들은 보상의 기쁨들이기 때문입니다. 스피노자에게, 미움의 사람, 원한의 사람 등등은 최초의 슬픔에 의해 중독된 기쁨을 가지고 있는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슬픔이란 이와 같은 기쁨들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슬픔으로부터 기쁨을 끌어낼 수 있을 뿐입니다. 타자에 의해 그 스스로 겪게 되는 슬픔, 자기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해 타자에게 주게 될 슬픔, 이 모든 것은 하찮은 기쁨들을 위한 것입니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들은 간접적인 것인 기쁨들입니다. 우리는 간접적·직접적인 우리의 기준들을 재발견합니다. 모든 것이 이 수준에서 동시에 발생합니다.
(…)음악을 예로 들어 봅시다. 고통스러운 소리들이 있습니다. 내안에서 엄청난 슬픔을 일어나게 하는 고통스러운 소리들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언제나 이러한 고통스러운 소리들이 그와 반대로 유쾌하고 조화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삶의 기쁨을 만드는 것입니다. 즉 사랑과 미움의 관계입니다. 고통스러운 소리에 대한 나의 미움이 이 고통스러운 소리를 좋아하는 모든 사람에게까지 확대되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집에 가서 나에게는 도전으로 보이는 ―정말 이지 내 모든 관계들을 해체하는― 이러한 고통스러운 소리들을 듣습니다. 이 소리들은 내 머릿속으로 들어옵니다. 그 소리들은 내 뱃속으로 들어옵니다. 내 힘의 전체 부분은 나를 관통하는 이러한 소리들과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무감각해지가 됩니다[경화됩니다]. 나는 고요함을 얻고,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켭니다. 모든 것이 바뀝니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나의 관계들과 합성되는 공명 관계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내 기계가 고장나는 바로 그 순간을 상상해 보세요. 내 기계가 고장납니다. 나는 미움을 경험합니다. (리차드:오, 저런!) 이의가 있나요? (들뢰즈의 웃음) 드디어 나는 하나의 슬픔을, 큰 슬픔을 경험합니다. 좋아요,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켭니다. 그럼 내 온몸은, 그리고 나의 영혼은 말할 것도 없이 그 관계들과 공명 관계를 합성합니다. 이것이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내 힘은 증가됩니다. 그래서 스피노자로 말할 것 같으면, 그 점에서 나를 항미롭게 하는 것은, 기쁨의 경험 속에서는 슬픔에서와 같은 그러한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도무지 투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왜 그런지 이유를 살펴볼 것입니다) 일정한 양의 능력이 나의 힘에서 제외된다는 것을 의미하게 될 어떤 경화된 부분의 투여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요? 그 관계들이 합성될 때, 그 관계가 합성하는 두개의 사물이 어떤 우월한 개체, 즉 그것들을 부분들로 둘러싸고 부분들로 취하는 제3의 개체를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좋아하는 음악과 관련해서, 모든 것이 마치 관계들의 직접적인 합성이 만들어지는 것처럼(여러분은 우리가 언제나 직접적인 것의 기준 속에 놓여 있다는 점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관계들의 직접적인 합성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발생합니다. 이런 식으로 제3의 개체가 합성됩니다. 내가, 혹은 음악이 하나의 부분에 지나지 않는 그런 개체가 합성됩니다. 지금부터 나는 나의 능력이 확정되었다고, 즉 그 능력이 증가되었다고 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