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MARK/humanities

반미학/할 포스터편

Jean Cocteau 2011. 1. 20. 19:45
 일단 '흉내내기'가 기계적인 재생산을 상징한다는 것(데리다의 경우)을 알게 된다면, 참고대상이 없는 표상성은 영화나 테이프가 '언어'로서 작용하는 방법을 설명한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영화나 테이프에서는 장면과 소리(콜라주의 어휘로 보면 기계적인 재생산은 장면과 소리를 그 전후관계로부터 제거하거나 분리한다. 즉 이들 장면과 소리의 동기를 해체한다. 따라서 참고대상의 '상실', 환상의 미결정성이 이루어진다.)를 정확하게 복사해서 이들 장면과 소리를 새로운 체계 내에서의 기표로서 그 동기를 다시 부여한다. 말라르메는 이성중심의 모방학으로부터 '모방하기'를 분리해냄으로써 '모더니스트'라는 별칭을 부여받았고, 데리다는 새로운 참고물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모방하기를 작품에 적용함으로써 '포스트 모더니스트'라는 별칭을 부여받았다(뒤이어지는 '알레고리'부분에서 논의된다.)
 '모방 기술'(mumed writing)에 대한 데리다의 첫번째 실험은 주로 직접적으로 거대한 인용("아마도 앞으로 알게 되겠지만 여기에서 다시 인용 만을 하게 되며 인용 이외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Gals, 24)으로 이루어져 있다. 데리다의 연구의 대전제는 반복이 '독창적'이라는 점이다. "반복하거니와 동일한 행은 더이상 정확하게 동일한 행이 아니다. (둥근) 반지는 더이상 동일한 중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 '독창성이 작용한다.'" 하나의 텍스트에 다른 텍스트를 이중인화하고자 하는 데리다의 욕망(모방하기가 언급되어 있는 프로그램)은, 원상태로 되돌릴수 없는 기호의 시간성과 관련짓기 보다는 '차연'과 관련지어 사용하며 원상태로 되돌릴 수 있는 참고대상이나 표상성의 일시성에 의해서 그 체계(참고사항과 표상성의 체계)를 만들어 내려는 시도이다. 따라서 처음부터 해체주의의 전략은 반복하는 데에 있었다. "두가지 계열의 사유 사이에서는 아마도 어느 하나를 선택할 여지가 없는 것 같다. 오히려 우리의 임무는 하나의 사유가 다른 사유로 무한하게 변화하도록 하는 '순환성'을 고려하는 데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순환'을 그 자체의 역사적 가능성 속에서 엄격하게 반복함으로써, 반복 속에 포함되어 있는 차이점 내에서 어떤 생략적인 현장의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처음에는 '텍스트'를 교직―언어로 '짜여진'―이라고 해석하였으며, 이러한 교직에서 해체주의적인 기술은 '결함'이나 '잘못'―텍스트를 분할할 수 있는 결합이나 분절의 시작부분―을 찾아냄으로써 연구대상의 표면을 추적하게 된다('추적'으로서의 기술). 해체주의는 사실 '핵심 저서' 자체에서 사용되었던 바로 그 어휘―소쉬르로부터의 '차이점', 루소로부터의 '보충'등― 를 차용해서 이들 어휘에 대해서 동기를 재부여하고 기존의 개념적인 세트나 기호 영역으로부터 분리하여 ('기술소'의 원칙에 의해서) 그것을 다른 영역에 재배치함으로써 이루어진다(그러나 언제나 말 그 자체에 있어서 가능한 잠재성이나 자료에 최대한의 체계적인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발전된 '정확한' 반복의 전략으로서, 어휘의 차용과 직접 인용은 연구대상에 대한 일반적인 허상의 형성으로 대체되었다. 이러한 실천은「카르투슈」(cartouche, 그 안에 잠언이나 가문의 상징물을 새김)―『그림의 진실성』에 수록되어 있음―처럼 극단적인 경우에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다. 이러한 카르투슈에서의 임무는 담화에서의 시각적인 작용을 모방하는 것이다. 이 글에서의 참고대상은 하나의 '조각'―'적당한' 부피의 마호가니 상자―과 이 조각을 '모델'로 하여 각각 다른 각도에서 그린 127편의 그림으로 이루어진 『틀링기트족의 관』(틀링기트 족은 미국 알라스타 주 남부에 사는 인디언 부족)이라는 제목을 붙인 제라르 티루스-카멜의 그림이다. 『틀링기트족의 관』속에 존재하는 조각과 그림과의 관계는 데리다의 비평적으로 모방하기와 그 지시대상(모델)의 선택과의 관계를 나타내든가 표시한다. 조각(모델로서의 상자)은 '그것이 일부분을 이루는 계열에 속하지는 않지만' 그러한 계열에 대해서는 이질적이다. 앞에서 강조한 바와 같이 데리다 자신의 담화는 '아무것도 언급하지 않으며', 독자나 관람자 자신에게 작품에 대한 감상을 미루며, "다른 이론, 다른 시리즈처럼, 나 자신은 물론 그 자신에게조차 그 작품이 무엇을 나타내는가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도 없이 침묵 속에서 작품을 지나쳐 버린다."
 예술은 '말한다'고 선언한 하이데거와는 달리 데리다는 『틀링기트족의 관』의 그림 시리즈의 무언성을 주장하거나, 개념도 없고 결론도 없는 이 그림 자체가 지니고 있는 작용 능력을 주장한다. "이러한 점이 '실물 설명'일 것이다. 손쉬운 말장난을 남용하지 말도록 하자. 실물설명은 전시하지 않고도, 어떤 결론을 증명하지 않고도, 어떤 것을 수반하지 않고도, 어떤 가능한 논지가 없이도 증명할 수가 있다. 실물 설명은 상이한 방법으로 증명하지만, 그 증명과정은 '실물설명'이나 '비실물설명' 단계에 의존한다. 실물설명은 그 자체의 설명과정에서 제시가능한 담화대상을 내세우기보다는 스스로를 변형시킨다. 즉, 일련의 이 그림 시리즈는 모델의 예시에 대한 관계에서 질서와 표상성의 문제를 실물 그 자체로서 설명한다. 이 점이 바로 데리다가 왜 이 일련의 그림 시리즈를 선정했고 또 그것을 전형적인 표본으로 삼았는지에 대한 이유가 된다. 실제로 데리다 자신의 텍스트는 그림이 상자―『숫자들』처럼 상자가 설명을 제시하기 때문에 전형적인 표본으로 된 하나의 예―와 관련되는 방법에 의해서 그림과 관련된다.
『틀링기트족의 관』을 흉내내는 전략은 이같은 방식(『숫자들』의 내용이 본질적으로 무시된 것과 같은 방식으로)으로 창조가능한 대상을 무시하는 것이고 작품의 구조화과정을 흉내내는 것, 즉 어휘(카르투슈, 패러디임, 규정, 우발성 등과 같은)의 "우발성"을 야기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다. 어휘의 이러한 우발성은 티투스-카멜이 하나의 모델에 대한 자신의 그림에서 127가지의 변화를 추구했던 방식과 대등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러한 127가지의 변화에서 데리다는 '일련의 이탈, 변화, 변조, 왜상에 의해서 그 변화를 투시화법 속에 배치하였고 모든 의미(방향)에서 그 변화를 살펴 보았으며', 마침내 미리 결정된 페이지 숫자 다음에서 끝나버림으로써 장확하게 일련의 127가지 그림과 똑같은 우발적인 필요성과 자의적인 동기화 효과를 만들어 내었다. '어구전철'(anagram, 철자의 위치를 바꾸어서 새 어구를 만들어 내는 것을 의미하며 예를 들면 time을 emit로, emit를 mite로 바꾸는 것 등이 있다)과 '동음이의어'는 '왜상'이 표상적인 투시화법에 작용하는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어휘의 용법에 작용한다. 일간지에서의 날짜가 적힌 표제어처럼, 하나의 주제에 관해서 다양하게 나타나는 각각의 표제어를 합성함으로써, 데리다는 날짜가 표시된 그림을 더욱 흉내내게 된다. 이러한 점이 번역으로서의 허상의 논리, 즉 시각적인 의미를 언어적으로 모방하기에 대한 허상의 논리로서, 모방하기는 지시대상과는 무관하게 다른 텍스트에서도 똑같이 작용한다.
 (…)따라서 '기술의 통달'과 지식과의 관계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설명에서처럼, 후기비평은 '퍼포먼스'―만들기, 생산하기, 행하기, 행동하기로서의 지식―의 '인식론'에 의해서 작용한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어떻게 나아갈지(go on)를 알고 있다!" 라는 비트겐슈타인의 지식인처럼, 후기비평도 이제 그것이 나아가야 할 바를 알고 있다. 여기에서 사용된'go on'의 'on'은 데리다의 살아가기(living on)에서 'on'이 지니고 있는 기생적인 의미 및 모든 범주와 애매모호성을 포함하는 식으로 비평의 대상에 '관해서'(on) 기술한다. 기술은 그것이 말하는 것보다 더 많이(다른 것) 제시한다―기술의 이러한 잉여 가치'는 데리다의 관심을 유발한다. 이같은 '더'(more)라는 명칭은 '알레고리'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