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MARK/humanities
랑데부/존 버거
Jean Cocteau
2010. 12. 29. 17:29
우리가 작별을 고할 때마다
영화는 그 이미지가 움직이기 때문에, 우리가 있는 곳에서부터 액션이 있는 장면으로 우리를 데리고 간다. (액션! 감독은 장면을 움직이도록 이렇게 외치거나 중얼거린다.)
이제 시네마를 극장과 비교해 보자. 극장과 시네마 모두 극적 예술이다. 극장은 시즌 동안 매일 밤 대중들 앞에 배우를 데려온다. 배우들은 같은 드라마를 매일 밤 재공연한다. 극장의 특성에는 제례 의식의 반복이라는 느낌이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시네마는 관객을 개별적으로 한 사람씩 극장에서 벗어나서 미지의 세계로 이동시킨다. 동일한 장면을 스무 번이나 찍을 수도 있지만, 사용된 장면은 가장 그럴듯하기 때문에 선택되며 '첫번째' 모습과 소리가 된다.
그렇다면 이 첫번째는 어떻게 발생하는가/ 물론 무대 위에서는 아니다 그렇다면 스크린 위에서? 불빛이 꺼지는 순간 스크린은 더 이상 표민이 아니라 공간이다. 스크로베니 교회의 벽과 같은 벽이 아니라, 그 공간은 하늘과 더욱 흡사하다. 사건과 사람들로 가득 찬 하늘, 영화 스타들이 이 영화의 하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면 과연 그들이 어디로부터 왔겠는가? 시네마의 스케일과 결은 하늘 효과를 고양시킨다. 이로 인해 작은 TV 화면으로 보는 영화 필름은 운명이라는 느낌을 많이 잃어버리게 된다. 만남은 더 이상 하늘에서가 아니라 (TV를 올려 놓는) 장식장에서 이루어진다.
연극이 끝나면 배우들은 자신들이 연기했던 역할을 버리고 관객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무대 앞으로 나온다. 배우들이 받은 박수갈채는 오늘 밤 연극을 극장으로 가져다 준 그들의 노고를 인정한다는 신호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아직 살아 있는 주인공은 움직이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을 줄곧 뒤따라다니고 추적하다가, 마침내 그곳에서 빠져나온다. 주인공들은 우리로부터 달아나야 한다. 시네마는 완벽하게 떠남에 관한 것이다.
"시네마에 미학이 있다면, 그건 한 단어로 요악할 수 있다. 그것은 운동이다"라고 르네 클레르는 말했다. 이 한 단어가 무비(movie)이다.
(…)
그렇다면 시네마는 자신의 특수한 힘을 획득하는 데 미치는 이와 같은 한계를 어떻게 극복하는가? 우리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것을 축하함으로써 그렇게 한다. 다시 말해 시네마는 개별성을 넘어서려는 갈망이다.
개인주의자의 원형인 시민 케인을 생각해 보라. 이 스토리의 처음에 그는 죽고, 영화는 그 사람이 과연 어떤 사람이었는가라는 수수께끼를 조립하고자 한다. 그는 다양한 인물이었던 것으로 판명된다. 우리가 마침내 그로 인해 감동을 받는다면, 그것은 영화의 어디쯤에서 그가 우리들 누구나와 마찬가지 인물이었을 수도 있다는 점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영화가 전개되면서 영화는 그의 개별성을 용해시킨다. 시민 케인은 우리와 같은 공동의 시민이 된다.
입센의 연극에 등장하는 마스터 빌더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백치>에 나오는 미슈킨 왕자에게도 이것이 똑같은 사실만은 아니다.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에서 토마스 만의 아쉔바하의 죽음은 신중하고도 개별적이다. 하지만 비스콘티의 아쉔바하는 공적으로, 그리고 극적으로 죽는다. 그러나 이런 차이는 비스콘티가 단순히 선택한 결과일 뿐만 아니라 매체의 서사적인 필요성에 의해 생겨난 것이기도 하다. 활자로 씌어진 판본에서 우리는 아쉔바하 뒤를 따라가는데, 그는 죽을 곳을 찾아 은신처로 들어가는 동물처럼 물러난다. 영화적인 각색에서 보가드는 우리에게 가까이 와서 클로즈업 속에서 죽는다. 자신의 죽음으로 그는 우리에게 다가온다.
소설을 읽을 때, 우리는 종종 우리 자신을 등장 인물과 동일시한다. 시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언어 그 자체와 동일시한다. 시네마는 또 다른 방식으로 작용한다. 시네마의 연금술은 그와 같아서 등장 인물이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와 동일시한다!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유일한 예술이 바로 영화다.
영화는 그 이미지가 움직이기 때문에, 우리가 있는 곳에서부터 액션이 있는 장면으로 우리를 데리고 간다. (액션! 감독은 장면을 움직이도록 이렇게 외치거나 중얼거린다.)
이제 시네마를 극장과 비교해 보자. 극장과 시네마 모두 극적 예술이다. 극장은 시즌 동안 매일 밤 대중들 앞에 배우를 데려온다. 배우들은 같은 드라마를 매일 밤 재공연한다. 극장의 특성에는 제례 의식의 반복이라는 느낌이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시네마는 관객을 개별적으로 한 사람씩 극장에서 벗어나서 미지의 세계로 이동시킨다. 동일한 장면을 스무 번이나 찍을 수도 있지만, 사용된 장면은 가장 그럴듯하기 때문에 선택되며 '첫번째' 모습과 소리가 된다.
그렇다면 이 첫번째는 어떻게 발생하는가/ 물론 무대 위에서는 아니다 그렇다면 스크린 위에서? 불빛이 꺼지는 순간 스크린은 더 이상 표민이 아니라 공간이다. 스크로베니 교회의 벽과 같은 벽이 아니라, 그 공간은 하늘과 더욱 흡사하다. 사건과 사람들로 가득 찬 하늘, 영화 스타들이 이 영화의 하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면 과연 그들이 어디로부터 왔겠는가? 시네마의 스케일과 결은 하늘 효과를 고양시킨다. 이로 인해 작은 TV 화면으로 보는 영화 필름은 운명이라는 느낌을 많이 잃어버리게 된다. 만남은 더 이상 하늘에서가 아니라 (TV를 올려 놓는) 장식장에서 이루어진다.
연극이 끝나면 배우들은 자신들이 연기했던 역할을 버리고 관객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무대 앞으로 나온다. 배우들이 받은 박수갈채는 오늘 밤 연극을 극장으로 가져다 준 그들의 노고를 인정한다는 신호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아직 살아 있는 주인공은 움직이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을 줄곧 뒤따라다니고 추적하다가, 마침내 그곳에서 빠져나온다. 주인공들은 우리로부터 달아나야 한다. 시네마는 완벽하게 떠남에 관한 것이다.
"시네마에 미학이 있다면, 그건 한 단어로 요악할 수 있다. 그것은 운동이다"라고 르네 클레르는 말했다. 이 한 단어가 무비(movie)이다.
(…)
그렇다면 시네마는 자신의 특수한 힘을 획득하는 데 미치는 이와 같은 한계를 어떻게 극복하는가? 우리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것을 축하함으로써 그렇게 한다. 다시 말해 시네마는 개별성을 넘어서려는 갈망이다.
개인주의자의 원형인 시민 케인을 생각해 보라. 이 스토리의 처음에 그는 죽고, 영화는 그 사람이 과연 어떤 사람이었는가라는 수수께끼를 조립하고자 한다. 그는 다양한 인물이었던 것으로 판명된다. 우리가 마침내 그로 인해 감동을 받는다면, 그것은 영화의 어디쯤에서 그가 우리들 누구나와 마찬가지 인물이었을 수도 있다는 점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영화가 전개되면서 영화는 그의 개별성을 용해시킨다. 시민 케인은 우리와 같은 공동의 시민이 된다.
입센의 연극에 등장하는 마스터 빌더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백치>에 나오는 미슈킨 왕자에게도 이것이 똑같은 사실만은 아니다.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에서 토마스 만의 아쉔바하의 죽음은 신중하고도 개별적이다. 하지만 비스콘티의 아쉔바하는 공적으로, 그리고 극적으로 죽는다. 그러나 이런 차이는 비스콘티가 단순히 선택한 결과일 뿐만 아니라 매체의 서사적인 필요성에 의해 생겨난 것이기도 하다. 활자로 씌어진 판본에서 우리는 아쉔바하 뒤를 따라가는데, 그는 죽을 곳을 찾아 은신처로 들어가는 동물처럼 물러난다. 영화적인 각색에서 보가드는 우리에게 가까이 와서 클로즈업 속에서 죽는다. 자신의 죽음으로 그는 우리에게 다가온다.
소설을 읽을 때, 우리는 종종 우리 자신을 등장 인물과 동일시한다. 시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언어 그 자체와 동일시한다. 시네마는 또 다른 방식으로 작용한다. 시네마의 연금술은 그와 같아서 등장 인물이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와 동일시한다!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유일한 예술이 바로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