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MARK/humanities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리오 휴버먼
Jean Cocteau
2010. 12. 4. 02:01
십자군은 상업을 크게 촉진했다. 수만 명의 유렵인들이 이슬람 교도들에게서 성지를 탈환하기 위해 육로와 해로로 대륙을 건넜다.그들은 원정 내내 물품이 필요했고, 상인들이 이 물품을 조달하기 위해 동행했다. 동방 원정에서 돌아온 십자군 전사들은 그들이 보고 즐긴 진기하고 사치스러운 음식과 옷에 대한 욕구도 함께 가지고 돌아왔다. 그들의 수요가 이런 상품을 위한 시장을 탄생시켰다. 게다가 10세기를 지나면서 인구가 급증했고, 인구가 늘어나자 필요한 재화도 늘어났다. 그리고 늘어난 인구 중 일부는 토지가 없었기 때문에 생활 조건을 개선할 기회를 십자군에서 찾았다. 지중해 연안의 이슬람 교도들과 동유럽의 여러 부족들을 상대로 한 영토 전쟁은 십자군이라는 존엄한 이름이 붙었지만, 실제로는 약탈과 토지를 위한 전쟁이었다. 교회는 이 약탈 원정이 복음을 전파하거나 이교도를 절멸하거나 성지를 수호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존엄을 가장했다.
성지 순례는 일찍부터 있었다.(8세기부터 10세기까지 34번 있었고, 11세기에는 117번 있었다.) 성지를 수복하고자 하는 열망은 진실했고 딴 속셈이 없는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십자군 운동의 진정한 힘과 그것을 이끈 활력은 특정 집단이 얻을 수 있었던 이익에 주로 바탕을 두고 있었다.
그 집단은 첫째, 교회였다. 물론 교회는 분명한 종교적 동기가 있었다. 교회는 당시가 전쟁의 시대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만약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기독교국으로 바뀔 다른 나라들로 전사들의 폭력적인 열정을 옮겨놓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1095년 교황 우르반 2세가 프랑스의 클레르몽을 방문햇다. 샤르트르 사람인 풀셰에 따르면, 교황의 설교를 듣고 싶어한 모든 사람을 수용할 만큼 큰 건물이 없었기 때문에 널따란 평지에서 교황은 다음과 같은 말로 청중에게 십자군에 자원하라고 촉구했다. "전에는 사사로운 다툼에서 충실한 신도들과 사악하게 싸우는 데 익숙해진 사람들을 이교도와 싸우게 하자. ……지금까지는 강도였던 사람들을 이제는 병사가 되게 하자. 전에는 형제와 친척들과 싸웠던 사람들을 이제는 싸워야 할 야만인들과 싸우게 하자. 전에는 낮은 임금을 받은 용병들을 이제는 영원한 보상을 받게 하자." 교회는 세력 확장을 원했고, 기독교 세계가 넓어질수록 교회의 권력과 부도 커졌다.
둘째, 아시아의 이슬람 세력권 중심과 매우 가까이 있었고 콘스탄티노플에 수도를 둔 비잔틴 제국과 비잔틴 교회[그리스 정교회]였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십자군을 세력 확장의 기회로 여겼던 한편, 그리스 정교회는 자기 영토에 이슬람 교도들이 진출하는 것을 막을 수단으로 보았다.
셋째, 전리품을 원했거나 빚을 진 귀족과 기사, 유산이 적거나 전혀 없었던 젊은 자제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십자군이 토지와 부를 얻을 기회라고 생각했다.
넷째, 이탈리아의 도시들인 베네치아·제노바·피사였다. 베네치아는 언제나 무역 도시였다. 한 무리의 섬으로 이루어진 도시는 그렇게 될 수박에 없었다. 만약 어느 도시의 거리가 운하로 돼 있다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배 위에서 사는 것이 땅에서 사는 것만큼 편안할 것이다. 베네치아 사람들은 실제로 그랬다. 지중해를 창구로 한 동방 무역이 중요한 무역이었던 시기에 베네치아는 이상적인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지도를 잠깐만 보더라도 왜 베네치아와 그 밖의 이탈리아 도시들이 그토록 중요한 무역 중심지가 됐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지도를 통해서는 알 수 없지만 마찬가지로 사실인 것은, 서유럽이 콘스탄티노플과 동방과 단절한 뒤에도 베네치아는 후자와 계속 관계를 유지했다는 점이다.[서유럽의 로마 교회는 726년 동로마(비잔틴) 황제의 성상 숭배 금지령에 반발하고 800년 로마 교황이 키롤루스를 서로마 황제로 대관한 것을 계기로 비잔틴 제국의 황제와 대립해 오다가 마침내 11세기 중엽에 동방 교회와 완전히 갈라섰다.] 콘스탄티노플이 얼마동안 지중해 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엿기 때문에 이점은 더욱 컸다. 이 때문에 동방의 향료·비단·모슬린·약재·앙탄자는 유리한 처지에 있던 베네치아 사람들이 유럽으로 실어 날랐다. 베네치아·제노바·피사는 주로 무역 도시였기 때문에 소아시아 연안 도시들과의 무역할 수 있는 특권을 원했다. 이 소아시아 도시들에는 그리스도의 적인 혐오스런 이슬람 교도들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베네치아 사람들이 이점 때문에 무역을 망설였을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탈리아의 무역 도시들은 십자군을 상업상의 이익을 얻을 기회로 여겼다. 그래서 제3차 십자군은 성지 탈환이 아니라 이탈리아 도시들에게 상업상의 이익을 가져다 주는 데 목적이 있었다. 십자군 전사들은 연안의 무역 도시들을 탐냇기 때문에 예루살렘을 그냥 지나쳤다.
모든 역사에서 권력을 가진 자들과 부유한 자들은 자신들이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온갖 수단을 사용하려 했다. 개는 자기 뼈다귀를 놓지 않으려고 애쓴다. 많은 경우에 봉건 영주들과 주교들은(특히 주교들은)이빨을 뼈다귀에 쑤셔 박고서 도시민들의 폭력으로 어쩔 수 없게 될 때까지 내놓지 않았다. 일부에게 그것은 단지 자기들이 얻는 이익 때문에 오래된 특권에 매달리는 문제만은 아니었다. 역사에서 흔히 그런 것처럼, 현상 유지 덕분에 부자가 된 사람들은 대부분 현상 유지가 되지 않으면 정말로 사회 질서 전체가 붕괴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도시민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도시들은 폭력으로 자유를 획득했다. 이것은 올리버 웬덜 홈즈 판사의 다음과 같은 말이 옳음을 입증하는 듯하다. "차이가 너무 클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두기보다는 죽이려고 한다."
우리가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변화라고 부른 생산 양식과 교환의 혁명이 일어났을 때, 낡은 과학, 낡은 법, 낡은 교육, 낡은 정부, 낡은 종교는 어찌 됐을까? 그것들 역시 변했다. 그것들은 변해야만 했다. 1800년 식의 법 실행과 1200년 식의 법 실행은 매우 달랐다. 종교의 가르침도 마찬가지였다. 상인·제조업자·은행가가 지배하는 세계는 성직자와 전사가 지배하던 세계와는 다른 종교적 가르침이 필요했다.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적절하게 유지하는 것이 노동의 목적인 사회에서 교회는 폭리는 취하는 자들을 비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윤을 얻는 것이 노동의 일차적인 목적이 된 사회에서 교회는 곡조를 바꿔야 했다. 수공 기술자들이 단순히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일하는 봉건적 수공 경제에 의존하고 있던 가톨릭 교회가, 자본가가 이윤을 얻기 위해 일하는 자본주의 경제에 부응하는 만큼 빨리 그 가르침을 바꿀 수 없었던 반면, 개신 교회는 그럴 수 있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개신 교회는 상이한 여러 교파로 갈라져 있었지만, 재산을 모으는 데 관심 있는 자본가들은 정도는 달랐을지라도 모든 교파에서 위안을 얻었다.
청교도를 예로 들어 보자. 가톨릭의 강론자들이 부자가 되는 길은 지옥으로 가는 길이라고 경고한 반면, 청교도 리처드 백스터는 신도들에게 부를 얻을 기회를 이용하지 못하면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고 설교했다. "만약 하느님이 어떤 방법보다 더 많이 벌 수 있는(여러분의 영혼이나 다른 어떤 사람을 잘못되게 하지 않으면서)합법적인 방법을 가르쳐 주시는데도, 여러분이 이 방법을 거부하고 이익이 적은 방법을 택한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소명 가운데 하나를 거스르는 것이며, 하느님의 종이 되기를 거부하는 것이며,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여 하느님이 요구하실 때 하느님을 위해 그 은총을 사용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육체와 죄악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을 위해서라면 여러분은 부자가 되려고 힘써도 된다."
감리교를 예로 들어보자. 감리교를 창시한 유명한 지도자 존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썼다. "사람들이 근면하고 검소해지는 것을 막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기독교인들이 얻을 수 있는 모든 이익을 얻고 저축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저축하도록 권장해야 한다. 이것은 사실상 부자가 되는 것이다."
칼뱅 파[장로교]를 예로 들어 보자. 종교 개혁은 16세기에 일어났다. 당시는 훗날의 대규모 자본주의 생산에 필요한 자본 축적의 기회가 과거 어느 때보다도 컸던 때였다. 칼뱅이 가르친 것은 특히 자본주의 기업 정신이었다. 과거의 가톨릭 교회는 상인을 "이익욕"이라는 죄를 짓는 자라고 의심한 반면, 신교도인 칼뱅은 이렇게 썼다. "사업으로 얻는 소득이 토지 서유로 얻는 소득보다 많아서는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상인의 이윤이 그 자신의 근면과 부지런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면 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이란 말인가?"
칼뱅주의가 신흥 부르주아지의 신념이 됐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렇듯 맑스의 잉여가치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이 어떻게 착취되는가 하는 수수께끼를 해결하고 있다. 전체 과정을 다음과 같은 짧은 문장들로 요약해 보자.
자본주의 사회는 팔기 위한 재화의 생산, 즉 상품 생산과 관계가 있다.
어떤 상품의 가치는 그 상품을 생산하는 데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 시간으로 결정된다.
노동자는 생산수단(토지·도구·공장 등)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
노동자는 살기 위해서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유일한 상품, 즉 노동력을 팔아야 한다.
노동자가 지니고 있는 노동력의 가치는 상품의 가치와 마찬기지로 그것을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총액이다. 노동력의 경우에 그 가치는 노동자의 생계에 필요한 재화의 총액이다.
따라서 노동자에게 지급되는 이금은 오직 노동자의 생계에 필요한 재화의 총액이다.
그러나 노동자는 이 총액을 하루 중 일부 노동 시간만으로 (전체 노동 시간보다 적은 시간만으로) 생산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노동자는 일부 시간 동안만 자신을 위해 일한다.
노동자가 임금으로 받는 것과 노동자가 생산하는 상품의 가치 사이의 차이가 잉여가치가.
잉여거치는 사용자, 즉 생산수단 소유자에게 돌아간다
잉여가치는 이윤·이자·지대, 즉 유산 계급의 수입 원천이다.
잉여가치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 착취의 척도다.
자본주의 국가의 계획 당국이 내리는 결정은 효과가 없다. 왜냐하면 만약 그 결정으로 한 무리의 재산 소유자, 이를테면 쿠바의 설탕을 수입하는 업자들이 혜택을 본다면, 다른 재산 소유자들, 이를테면 미국의 설탕 재배업자들이 그 결정을 반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가 당국은 그들을 강제로 복종시킬 권한이 전혀 없기 때문에, 이번에는 이쪽에 한입 주고 다음에는 저쪽에 한 입 주는 식으로 오락가락하지 않을 수 없다.
바브러 우튼 여사는 <계획이냐 무계획이냐>라는 책에서 생산수단이 사유 재산으로 남아있을 때, 계획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 준다.
"생산수단을 가동하며 생산물을 판매해 얻는 재무 성과에만 관심이 있는 사적인 개인들이 생산수단과 생산물을 소유하는 한, 틀림없이 자기 산업이나 기업에 가장 유리한 방침을 채택하려는 그런 개인들의 견해를 다라 기업별로 또는 산업별로 중요한 경제적 결정이 내려진 것이다. ……강철 생산은 강철 공장의 낙원을 만들기 위해 계획될 것이며, 그림 생산은 화가들이 땅에서 천국을 누릴 수 있도록 계획될 것이다. 그것은 결국 사회가 산업을 계획하는 것이 아니라 산업이 사회를 계획하는 결과를 낳을 거라고 말해야 적절할 것이다."
중앙집중적 게획이 자본가들 자신을 위한 것일 때조차도 사유 재산 때문에 방해를 받는다면, 그 계획이 전국민을 위한 것일 때에는 얼마나 더 방해받기 쉽겠는가! 일례로 빈민가 문제를 보자, 빈민가를 없애야 한다는 데에는 누구나 동의한다. 그런데 왜 그렇게 되지 않을까? 이 분명한 공공의 필요를 방해하는 것은 무엇일까? 대답을 간단하다. 사유 재산, 즉 개인의 이익, 빈민가 주택에서 집세를 받아 돈을 버는 집주인들이 있다. 만약 빈민가의 거주자들을 위해 더 좋은 새 집을 건설하면 집세는 떨어진다. 그래서 빈민가를 없애는 일은 방해를 받는다. 또는 시행되더라도 삐걱거리며 서서히 진행될 뿐, 결코 완전하게 시행되지는 않는다. 이렇게 사유 재산의 이익은 사회의 이익을 방해한다.
성지 순례는 일찍부터 있었다.(8세기부터 10세기까지 34번 있었고, 11세기에는 117번 있었다.) 성지를 수복하고자 하는 열망은 진실했고 딴 속셈이 없는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십자군 운동의 진정한 힘과 그것을 이끈 활력은 특정 집단이 얻을 수 있었던 이익에 주로 바탕을 두고 있었다.
그 집단은 첫째, 교회였다. 물론 교회는 분명한 종교적 동기가 있었다. 교회는 당시가 전쟁의 시대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만약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기독교국으로 바뀔 다른 나라들로 전사들의 폭력적인 열정을 옮겨놓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1095년 교황 우르반 2세가 프랑스의 클레르몽을 방문햇다. 샤르트르 사람인 풀셰에 따르면, 교황의 설교를 듣고 싶어한 모든 사람을 수용할 만큼 큰 건물이 없었기 때문에 널따란 평지에서 교황은 다음과 같은 말로 청중에게 십자군에 자원하라고 촉구했다. "전에는 사사로운 다툼에서 충실한 신도들과 사악하게 싸우는 데 익숙해진 사람들을 이교도와 싸우게 하자. ……지금까지는 강도였던 사람들을 이제는 병사가 되게 하자. 전에는 형제와 친척들과 싸웠던 사람들을 이제는 싸워야 할 야만인들과 싸우게 하자. 전에는 낮은 임금을 받은 용병들을 이제는 영원한 보상을 받게 하자." 교회는 세력 확장을 원했고, 기독교 세계가 넓어질수록 교회의 권력과 부도 커졌다.
둘째, 아시아의 이슬람 세력권 중심과 매우 가까이 있었고 콘스탄티노플에 수도를 둔 비잔틴 제국과 비잔틴 교회[그리스 정교회]였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십자군을 세력 확장의 기회로 여겼던 한편, 그리스 정교회는 자기 영토에 이슬람 교도들이 진출하는 것을 막을 수단으로 보았다.
셋째, 전리품을 원했거나 빚을 진 귀족과 기사, 유산이 적거나 전혀 없었던 젊은 자제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십자군이 토지와 부를 얻을 기회라고 생각했다.
넷째, 이탈리아의 도시들인 베네치아·제노바·피사였다. 베네치아는 언제나 무역 도시였다. 한 무리의 섬으로 이루어진 도시는 그렇게 될 수박에 없었다. 만약 어느 도시의 거리가 운하로 돼 있다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배 위에서 사는 것이 땅에서 사는 것만큼 편안할 것이다. 베네치아 사람들은 실제로 그랬다. 지중해를 창구로 한 동방 무역이 중요한 무역이었던 시기에 베네치아는 이상적인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지도를 잠깐만 보더라도 왜 베네치아와 그 밖의 이탈리아 도시들이 그토록 중요한 무역 중심지가 됐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지도를 통해서는 알 수 없지만 마찬가지로 사실인 것은, 서유럽이 콘스탄티노플과 동방과 단절한 뒤에도 베네치아는 후자와 계속 관계를 유지했다는 점이다.[서유럽의 로마 교회는 726년 동로마(비잔틴) 황제의 성상 숭배 금지령에 반발하고 800년 로마 교황이 키롤루스를 서로마 황제로 대관한 것을 계기로 비잔틴 제국의 황제와 대립해 오다가 마침내 11세기 중엽에 동방 교회와 완전히 갈라섰다.] 콘스탄티노플이 얼마동안 지중해 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엿기 때문에 이점은 더욱 컸다. 이 때문에 동방의 향료·비단·모슬린·약재·앙탄자는 유리한 처지에 있던 베네치아 사람들이 유럽으로 실어 날랐다. 베네치아·제노바·피사는 주로 무역 도시였기 때문에 소아시아 연안 도시들과의 무역할 수 있는 특권을 원했다. 이 소아시아 도시들에는 그리스도의 적인 혐오스런 이슬람 교도들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베네치아 사람들이 이점 때문에 무역을 망설였을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탈리아의 무역 도시들은 십자군을 상업상의 이익을 얻을 기회로 여겼다. 그래서 제3차 십자군은 성지 탈환이 아니라 이탈리아 도시들에게 상업상의 이익을 가져다 주는 데 목적이 있었다. 십자군 전사들은 연안의 무역 도시들을 탐냇기 때문에 예루살렘을 그냥 지나쳤다.
모든 역사에서 권력을 가진 자들과 부유한 자들은 자신들이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온갖 수단을 사용하려 했다. 개는 자기 뼈다귀를 놓지 않으려고 애쓴다. 많은 경우에 봉건 영주들과 주교들은(특히 주교들은)이빨을 뼈다귀에 쑤셔 박고서 도시민들의 폭력으로 어쩔 수 없게 될 때까지 내놓지 않았다. 일부에게 그것은 단지 자기들이 얻는 이익 때문에 오래된 특권에 매달리는 문제만은 아니었다. 역사에서 흔히 그런 것처럼, 현상 유지 덕분에 부자가 된 사람들은 대부분 현상 유지가 되지 않으면 정말로 사회 질서 전체가 붕괴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도시민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도시들은 폭력으로 자유를 획득했다. 이것은 올리버 웬덜 홈즈 판사의 다음과 같은 말이 옳음을 입증하는 듯하다. "차이가 너무 클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두기보다는 죽이려고 한다."
우리가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변화라고 부른 생산 양식과 교환의 혁명이 일어났을 때, 낡은 과학, 낡은 법, 낡은 교육, 낡은 정부, 낡은 종교는 어찌 됐을까? 그것들 역시 변했다. 그것들은 변해야만 했다. 1800년 식의 법 실행과 1200년 식의 법 실행은 매우 달랐다. 종교의 가르침도 마찬가지였다. 상인·제조업자·은행가가 지배하는 세계는 성직자와 전사가 지배하던 세계와는 다른 종교적 가르침이 필요했다.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적절하게 유지하는 것이 노동의 목적인 사회에서 교회는 폭리는 취하는 자들을 비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윤을 얻는 것이 노동의 일차적인 목적이 된 사회에서 교회는 곡조를 바꿔야 했다. 수공 기술자들이 단순히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일하는 봉건적 수공 경제에 의존하고 있던 가톨릭 교회가, 자본가가 이윤을 얻기 위해 일하는 자본주의 경제에 부응하는 만큼 빨리 그 가르침을 바꿀 수 없었던 반면, 개신 교회는 그럴 수 있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개신 교회는 상이한 여러 교파로 갈라져 있었지만, 재산을 모으는 데 관심 있는 자본가들은 정도는 달랐을지라도 모든 교파에서 위안을 얻었다.
청교도를 예로 들어 보자. 가톨릭의 강론자들이 부자가 되는 길은 지옥으로 가는 길이라고 경고한 반면, 청교도 리처드 백스터는 신도들에게 부를 얻을 기회를 이용하지 못하면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고 설교했다. "만약 하느님이 어떤 방법보다 더 많이 벌 수 있는(여러분의 영혼이나 다른 어떤 사람을 잘못되게 하지 않으면서)합법적인 방법을 가르쳐 주시는데도, 여러분이 이 방법을 거부하고 이익이 적은 방법을 택한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소명 가운데 하나를 거스르는 것이며, 하느님의 종이 되기를 거부하는 것이며,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여 하느님이 요구하실 때 하느님을 위해 그 은총을 사용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육체와 죄악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을 위해서라면 여러분은 부자가 되려고 힘써도 된다."
감리교를 예로 들어보자. 감리교를 창시한 유명한 지도자 존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썼다. "사람들이 근면하고 검소해지는 것을 막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기독교인들이 얻을 수 있는 모든 이익을 얻고 저축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저축하도록 권장해야 한다. 이것은 사실상 부자가 되는 것이다."
칼뱅 파[장로교]를 예로 들어 보자. 종교 개혁은 16세기에 일어났다. 당시는 훗날의 대규모 자본주의 생산에 필요한 자본 축적의 기회가 과거 어느 때보다도 컸던 때였다. 칼뱅이 가르친 것은 특히 자본주의 기업 정신이었다. 과거의 가톨릭 교회는 상인을 "이익욕"이라는 죄를 짓는 자라고 의심한 반면, 신교도인 칼뱅은 이렇게 썼다. "사업으로 얻는 소득이 토지 서유로 얻는 소득보다 많아서는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상인의 이윤이 그 자신의 근면과 부지런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면 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이란 말인가?"
칼뱅주의가 신흥 부르주아지의 신념이 됐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렇듯 맑스의 잉여가치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이 어떻게 착취되는가 하는 수수께끼를 해결하고 있다. 전체 과정을 다음과 같은 짧은 문장들로 요약해 보자.
자본주의 사회는 팔기 위한 재화의 생산, 즉 상품 생산과 관계가 있다.
어떤 상품의 가치는 그 상품을 생산하는 데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 시간으로 결정된다.
노동자는 생산수단(토지·도구·공장 등)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
노동자는 살기 위해서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유일한 상품, 즉 노동력을 팔아야 한다.
노동자가 지니고 있는 노동력의 가치는 상품의 가치와 마찬기지로 그것을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총액이다. 노동력의 경우에 그 가치는 노동자의 생계에 필요한 재화의 총액이다.
따라서 노동자에게 지급되는 이금은 오직 노동자의 생계에 필요한 재화의 총액이다.
그러나 노동자는 이 총액을 하루 중 일부 노동 시간만으로 (전체 노동 시간보다 적은 시간만으로) 생산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노동자는 일부 시간 동안만 자신을 위해 일한다.
노동자가 임금으로 받는 것과 노동자가 생산하는 상품의 가치 사이의 차이가 잉여가치가.
잉여거치는 사용자, 즉 생산수단 소유자에게 돌아간다
잉여가치는 이윤·이자·지대, 즉 유산 계급의 수입 원천이다.
잉여가치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 착취의 척도다.
자본주의 국가의 계획 당국이 내리는 결정은 효과가 없다. 왜냐하면 만약 그 결정으로 한 무리의 재산 소유자, 이를테면 쿠바의 설탕을 수입하는 업자들이 혜택을 본다면, 다른 재산 소유자들, 이를테면 미국의 설탕 재배업자들이 그 결정을 반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가 당국은 그들을 강제로 복종시킬 권한이 전혀 없기 때문에, 이번에는 이쪽에 한입 주고 다음에는 저쪽에 한 입 주는 식으로 오락가락하지 않을 수 없다.
바브러 우튼 여사는 <계획이냐 무계획이냐>라는 책에서 생산수단이 사유 재산으로 남아있을 때, 계획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 준다.
"생산수단을 가동하며 생산물을 판매해 얻는 재무 성과에만 관심이 있는 사적인 개인들이 생산수단과 생산물을 소유하는 한, 틀림없이 자기 산업이나 기업에 가장 유리한 방침을 채택하려는 그런 개인들의 견해를 다라 기업별로 또는 산업별로 중요한 경제적 결정이 내려진 것이다. ……강철 생산은 강철 공장의 낙원을 만들기 위해 계획될 것이며, 그림 생산은 화가들이 땅에서 천국을 누릴 수 있도록 계획될 것이다. 그것은 결국 사회가 산업을 계획하는 것이 아니라 산업이 사회를 계획하는 결과를 낳을 거라고 말해야 적절할 것이다."
중앙집중적 게획이 자본가들 자신을 위한 것일 때조차도 사유 재산 때문에 방해를 받는다면, 그 계획이 전국민을 위한 것일 때에는 얼마나 더 방해받기 쉽겠는가! 일례로 빈민가 문제를 보자, 빈민가를 없애야 한다는 데에는 누구나 동의한다. 그런데 왜 그렇게 되지 않을까? 이 분명한 공공의 필요를 방해하는 것은 무엇일까? 대답을 간단하다. 사유 재산, 즉 개인의 이익, 빈민가 주택에서 집세를 받아 돈을 버는 집주인들이 있다. 만약 빈민가의 거주자들을 위해 더 좋은 새 집을 건설하면 집세는 떨어진다. 그래서 빈민가를 없애는 일은 방해를 받는다. 또는 시행되더라도 삐걱거리며 서서히 진행될 뿐, 결코 완전하게 시행되지는 않는다. 이렇게 사유 재산의 이익은 사회의 이익을 방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