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MARK/literature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김연수

Jean Cocteau 2010. 12. 4. 01:29
그리고 大腦와 性器사이에


 언론에서는 그게 공산주의적 세계관의 몰락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속단하는 기사를 썼지만, 그들은 분신정국 이후 상실의 늪에 빠진 운동권을 향한 고소의 심정만으로 그 기사를 썼지, 그들 역시 돌이킬 수 없는 몰락 속으로 빠져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했다. 그 몰락을 두고 어떤 사람들은 배신이라고 불렀고, 또 어떤 사람들은 패배라거나 승리라는 단어로 표현했고, 더 심각한 혹은 더 우스운 사람들은 포스트모던이라고 지칭했다. 뭐라고 부르든 그 단어들이 지시하는 바가 죽음, 상실, 몰락이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처럼 정체가 불분명한 프로파간다는 죽은 것은 바로 역사라고 재빠르게 선언함으로써 그 죽음을 입도선매하려 들었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정체가 불분명한 다른 프로파간다들을 제외하고는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그들은 그 '죽음'을 독점하려 했으나 그들 역시 한 시대의 구성원인 이상 그것은 불가능했다. 그 '죽음'과 '상실'과 '몰락'은 동시대인들에게는 절대적으로 주관적이었다. 그러므로 애당초 선언 따위로 객관화될 수 없었다. 동시대인들은 임상적으로 그 '죽음'과 '상실'과 '몰락'을 제 몸 안에서 앓는 수밖에 없었다. 그건 프랜시스 후쿠야마를 되뇌던 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하여 그들이 목도하게 된 것은 일찍이 황지우가 시「이준태(1946년 서울生, 연세대 철학과 졸, 미국 시카고 주립대학 졸)의 근황」에서 쓴 것과 같이 "그리고 大腦와 性器사이"의 세계였다. 대뇌와 성기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대뇌는 대뇌끼리, 성기는 성기끼리 서로 피곤할 정도로 싸우던 시절은 끝이 났다. "그리고 大腦와 性器사이에"의 세계에서는 개인들이 저마다 한 시대의 몰락을 주관화하고 내면화시키면서 전면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말은 곧 한 시대의 상처가 각 개인의 내면, 그러니까 대뇌와 성기 사이에서 치유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뜻했다. 그 시점부터 대뇌의 언어와 성기의 언어가 혼재하기 시작하다가 한동안은 성기의 언어만이 사회를 휩쓸었다. 이 사실은 1992년부터 라캉 유의 정신분석학이나 오시마 나기사의 <감각의 제국>과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따위의 영화가 크게 유행한 데에서도 잘 알 수 있다. 두말할 것도 없이 마광수 교수가 1991년 발표한 『즐거운 사라』로 구속된 것도, "모든 것이 이제 다 무너지고 있어도 환상 속에 기대가 있다"라고 노래한 '서태지와 아이들'이 데뷔한 것도 바로 1992년의 일이었다. 1991년 5월 이전까지만 해도 대뇌의 언어로 말하던 사람들이 1992년부터 모두 성기의 언어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그게 바로 1991년 5월 이후의 세상을 살아가던 사람들의 내면 풍경이었다.




인간이란 백팔십 번 웃은 뒤에야 겨우 한 번


 인간의 수명이 70살이라고 할 때, 우리는

1.38300리터의 소변을 본다.
2.127500번 꿈을 꾼다.
3.2700000000번 심장이 뛴다.
4.3000번 운다.
5.400개의 난자를 생산한다.
6.400000000000개의 정자를 생산한다.
7.540000번 웃는다.
8.50톤의 음식을 먹는다.
9.3330000000번 눈을 깜빡인다.
10.49200리터의 물을 마신다.
11.563킬로미터의 머리카락이 자란다.
12.37미터의 손톱이 자란다.
13.331000000리터의 피를 심장에서 뿜어낸다.

 할아버지는 4번과 7번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는 손수 종이에다 계산을 했어. 이번에는 곱하기 문제가 아니라 나누기 문제였다.

540000÷3000=180

 "하루에 사십이해일천이백만경 번 이산화탄소를 배출해내는 인간들로 가득 찬 이 지구에서도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까닭은 이 180이라는 숫자 때문이다. 인간만이 같은 종을 죽이는 유일한 동물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인간만이 웃을 줄 아는 유일한 동물이라는 것도 알아야 한다. 180이라는 이 숫자는 이런 뜻이다. 앞으로 네게도 수많은 일들이 일어날 테고, 그중에는 죽고 싶을 만큼 힘든 일이 일어나기도 할 텐데, 그럼에도 너라는 종은 백팔십 번 웃은 뒤에야 한 번 울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는 얘기다. 이 사실을 절대로 잊어버리면 안 된다."
 그렇게 말하고 잠시 말을 멈추더니 할아버지가 말했어.
 "그러니 네가 유명한 작가가 된다면 우리 인간이란 백팔십 번 웃은 뒤에야 겨우 한 번 울 수 있게 만들어진 동물이라는 사실에 대해 써야만 하는 거야."
 헬무트 베르크가 된 칼 하프너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또 너희 삼촌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리고 이길용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할아버지의 그 말씀이 생각났어. 이제 돌아가면 내가 본 것들을 글로 쓸 거야. 언제 돌아가냐고? 곧. 오늘 베르크 씨의 집으로 찾아온 사람이 내게 알려줬어. 방북했던 대표들이 베를린으로 돌아올 거야. 나의 임무는 모두 끝났어. 나는 이제 서울로 돌아갈 거야. 너를 만나러 갈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