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MARK/humanities

환대에 대하여/자크 데리다

Jean Cocteau 2010. 11. 21. 20:35

출생에서 죽음으로.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출생을 기초로 이방인[외국인]을, 타국인을, 가족이나 국민국가에 대한 이방인을 규정한다. 요컨대 외국인에게 영토의 법이나 혈연의 법에 입각하여 시민권을 부여하든 거부하든 간에, 외국인은 출생에 의해 외국인이다. 즉 이방인은 태생적으로 이방인이다. 여기서는 반대로 바로 죽음과 상(deuil)의 경험이, 바로 매장 장소가—말하자면—결정 요인이 된다. 이방인의 문제는 죽을 때, 여행자가 이국 땅에 영민할 때 일어나는 일과 관계가 있다.

‘강제 이주자들,’ 망명자들, 강제수용소에 수용된 자들, 추방된 자들, 고향 상실자들, 유목민들은 공통적으로 두 가지 한(soupirs)을, 두 가지 향수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곧 죽음과 언어이다. 한편으로 그들은 묻혀 있는 죽은 친지들이 최후의 거처[묘소]를 가지고 있는 장소로 최소한 순례 차원에서나마 돌아오기를 원한다(가족들의 최후 거처는 여기서 에도스(ethos)를 위치시킨다. 요컨대 자기-집, 도시 또는 나라를 규정하는 준거가 되는 주거를, 이곳에 부모•아버지•어머니•조부모가 안식을 취하고 있고, 이 안식은 여행과 멀리 떨어짐과 측정 기준이 되는 부동성의 장소이다). 다른 한편 망명자들, 강제수용소의 피수용자들, 추방된 자들, 고향 상실자들, 무국적자들, 무법의 유랑민들, 절대적 이방인들은 언어가 이른바 모국어가 최후의 고향이라고, 최후의 보루라고 흔히 인정한다. 그것이 어느 날 한나 아렌트가 들려 준 대답이다. 그녀는 언어에 관한 점을 제외하고는 더 이상 자신이 독일인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고, 마치 언어가 소속의 잔존물이기라도 하듯이 말하지 않던가. 우리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게 되겠지만 일들은 그렇게 단순 명쾌하지 못하다. 언어는 또한 그리고 그러한 점에서 소속의 첫 조건이자 마지막 조건인가 하면, 소유 박탈의 경험, 환원 불가능한 자기 고유성의 소유 박탈의 경험이기도 하다. 이른바 ‘모국의’ 언어는 이미 ‘타자의 언어’인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언어는 조국이다라고, 요컨대 세계의 망명자들, 외국인들, 유랑 유대인들 전체가 신발 창에 묻혀서 가져가는 것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괴물 같은 몸뚱이를, 있을 수 없는 몸뚱이를, 입과 혀과 발을 끌고 가는 몸뚱이를, 입과 혀가 발 밑에 끌려가는 몽뚱이를 그려내기 위해서는 아니다. 그것은 여기서도 다시금 발걸음이, 전행•공격•침범•탈선의 발걸음이 문제되고 있어서이다. 사실 언어란, 이른바 모국어란, 사람들이 자기 자신과 함께 가지고 가는 모국어란, 우리가 또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우리를 데리고 다니는 모국언란 무엇을 부르는 이름인가? 우리를 결코 떠나지 않는 자기-집을 나타내는 것은 아닐까? 고유한 것, 소유물, 적어도 소유물의 판타즘은 아닐까? 요컨대 우리 몸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리고—우리가 여기 다시금 되돌아왔는데—가장 양도 불가한 장소에 장을 주는 그런 것, 일종의 이동식 주거, 옷 또는 텐트에 장을 주는 그러한 소유물의 판타즘은? 방금 말한 바의 그러한 모국어란 사람들이 자기 위에 걸치고 있는 일종의 제2피부, 하나의 이동식 자기-집은 아닐까? 하지만 이 이동식 자기-집은 우리와 함께 이동하니 또한 절대 뜯어내 버릴 수 없는 자기-집은 아닐까?

전시간에 우리는 새로운 텔레테크놀로지에 대해, 요컨대 전화 텔레비전 팩스 e-메일 인터넷 등 차단을 도처에 이끌어 올 뿐 아니라 또한 장소의 정착 박탈, 집의 장소-해체(dis-location), 자기-집 내부로의 강제 침입을 이끌어 오는 이 모든 기계들에 대해 말했었다. 그런데 말이란, 모국어란 절대 쓰러지지 않는 자기-집에 불과하지 않으며, 사람들이 이러한 해체들에 대립시키는 저항 세력 항거-세력처럼 대립시키는 자기의 자기성에 불과하지 않다. 언어는 나와 함께 이동하는 까닭에 모든 가동성에 저항한다. 언어는 가장 덜 고정된 사물이고 최고의 운동성을 지닌 유기체 자체, 즉 모든 운동성들의 안정적이지만 휴대가 가능한 조건으로 머문다. 요컨대 내가 팩스나 ‘셀룰러’전화를 사용하고자 하면, 나는 필수적으로 내 위에, 나와 함께, 내 안에, 나처럼, 언어라고 불리는 전화기들 중에서 가장 동적인 전화기를, 그리고 자기가 말하는 것을 듣는 데 필요한 입과 귀를 휴대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 판타즘들 중에서도 가장 깨뜨릴 수 없는 것을 기술하고 있는데, 그렇다고 이 판타즘을 승인하자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처럼 나를 떠나지 않는 것인 언어는 또한 현실에 있어서 필연적으로, 판타즘을 넘어서, 나를 떠나기를 그치지 않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언어는 나‘로부터 출발해서만’ 간다. 그런가 하면 언어는 내가 출발하는 지점이고, 언어는 내가 나를 장식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며, 언어는 내가 떨어져 나오는 지점이다. 언어는 나로부터 출발하여 나에게서 멀어지는 것이다. 자신이-말하는 것을-듣기, 위에서 말한 바 있는 자기 자신이 말하는-것을-자기가-듣기의 ‘자기 촉발(autoaffection),' 남과-서로-듣고-말하기, 그것이야말로 동적인 것 가운데서 가장 동적인 것이라 하겠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곧 모든 이동전화들 중에서 가장 부동적인 것, 영-지정이고, 모든 이동들의 절대적 지방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사람들은 언어를 매 발걸음마다, 흔히 쓰는 표현을 빌리자면 신발창에 묻혀서 가지고 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이처럼 자신과 헤어지면서, 자신으로부터 출발하여 동일한 발길로 자신의 근원지를 떠나기를 그치지 않는 것과 결코 끝장을 보지 못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