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독신녀 / 정이현
"……그래, 언제 한번 보자."
"정말? 채린이는 내일도 좋고, 모래도 좋아. 그다음 날도 괜찮고. 참, 현주는 직장에 다니니까 일요일이 제일 편하겠구나. 그렇지? 흐음, 이번 주 일요일에는 성당에 한번 나가볼까 했는데, 괜찮아, 그다음 주부터 가지 뭐. 이번 주엔 그냥 너랑 만나서 맛있는 거 먹을래."
난감했다. 언제 한번 보자, 라는 문장은 이를테면 언어적 관습이었다. 그것은 Good-bye의 이음동의어인 동시에 See you later의 번역어였다. 피차 부담 없이, 부드럽게 전화를 끊기 위한 선의의 거짓말인 것이다. 일요일 오후는 안 된다고 둘러댈 만한 어떤 핑곗거리도 준비해두지 않았으므로 나는 채린의 제의에 얼결에 동의했다.
더 이상의 말은 묻지 않았다. 혹시 남자가 투자라는 명목으로 돈을 빌려가지 않았느냐는 따위의 질문도 하지 않았다.
"……괜찮은 거야?"
"그럼. 괜찮지 않으면 어쩌겠어?"
그녀가 야무지게 반문했다.
"돌이킬 수 없을 때 후회하는 것보다는 낫잖아."
한참 동안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 ……우리는, 아직, 스물다섯 살이니까."
롤 빗으로 앞머리를 둥글게 말고, 그 위에 헤어드라이어를 가져다 댄다. 뜨거운 열이 이마 위로 쏟아진다. 높이 세워진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살살 빗어 넘기면서 헤어스프레이를 힘껏 뿌린다. 옷장에 걸린 옷들 중에서 어깨에 사각의 커다란 패드가 들어간 구형 재킷과, 항아리 모양의 모직 스커트를 어렵게 찾아낸다. 1990년 2월, 대학 졸업을 기념하여 구입한 정장이다. 재킷의 소매에서 희미하게 좀약 냄새가 난다. 거울은 보지 않는다.
엄마는 텔레비전 앞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다. 조선 시대 궁녀로 분장한 젊은 여배우가 화면 속에서 희고 가지런한 치아를 드러내며 웃고 있다. 자다 깬 엄마가 내 모습을 보고 손등으로 눈을 비빈다.
"그 꼴을 하고 나가게?"
대답 대신 나는 조금 웃었다. 내 미소가 딱딱하게 보이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유행을 무시하며 살 수는 없을 줄 알았다. 이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삶은 유행보다 더디게 지나간다. 채린과 나는 얼마나 더 이곳을 견딜 수 있을까. 하지만 위험하지 않은 길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이제 나는, 그녀에게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