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교육과 거짓말 / 촘스키
대체로 학교는 사회의 지배계급, 즉 부와 권력을 장악한 사람들의 이익을 대변하도록 만들어진 기관이기 때문에 그런 교화는 필연적입니다. 말하자면, 교육의 장인 학교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학생들은 권력집단, 주로 기업집단을 옹호하도록 사회화되는 것입니다. 교육을 통한 사회화 과정에서 학생들이 배우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부와 권력을 장악한 사람들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으면, 결코 오래 버틸 수 없다는 쓰라린 교훈을 얻게 됩니다.
(지식인들이 어째서 그처럼 거짓된 선전과 공모할 수 있는가?)
그들은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학교라는 제도가 그들에게 요구하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을 뿐입니다. 교조적 시스템이 요구하는 것을 기꺼이,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이행하고 있을 뿐입니다. 목수를 고용해서, 목수가 계약한 내용대로 일을 해내는데 그 일을 어떤 식으로 해냈냐고 물을 수 있겠습니까? 목수는 계약한 내용대로 일을 해내면 그만입니다. 그렇습니다, 지식인도 비슷합니다. 부와 권력을 지닌 사람들, 즉 우리가 학교라고 부르는 기관을 소유한 사람들, 더 나아가서는 사회 전체를 소유한 사람들의 이익에 어긋나지 않도록 현실 세계를 애매하게 표현함으로써 그들이 기대한 효과를 안겨주는 사람들이 바로 지식인입니다.
그들에게(기업가, 정치가=특수계급) "공동의 이익"은 기업세계의 이익을 뜻할 뿐입니다. 리프만이 역설한 자유민주주의의 신조에 따르면 다수의 국민, 즉 우왕좌왕하는 무리는 그저 "방관자"로서 우리 민주주의의 한축을 차지할 뿐 "행동하는 참여자"로서 역할을 해내지 못합니다. 우리 민주주의에서, "우왕좌왕하는 무리"에 속한 사람들은 그저 선거라는 제도를 통해서 지도자를 선출하는 과정에 참여할 수 있지만, 선거라는 행위가 끝나면 다수의 대중은 뒤로 물러서서 다시 방관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왕좌왕하는 무리"가 방관자 이상의 역할을 하려 할 때, 즉 다수의 대중이 민주적 행위의 참여자가 되려 할 때, 그 특수 계급은 그런 현상을 "민주주의의 위기"라고 떠들어대며 저항합니다. 1960년대, 즉 역사적으로 소외계층에 머물렀던 사람들이 조직을 결성해서 특수계급의 정책, 특히 베트남 전쟁과 국내의 사회 정책에 이의를 제기했을 때, 엘리트 계층들 간에 얼마나 큰 반목이 있었습니까.
"우왕좌왕하는 무리"를 통제하는 방법의 하나는 3자위원회의 결정, 즉 학교를 "젊은이의 교화를 책임진 기관"으로 정의한 데 충실히 따르는 것입니다. 민간기업과 국가의 이익 및 가치를 먼저 생각하도록 "우왕좌왕하는 무리"에 속한 사람들을 세뇌시키는 것입니다. 지배계급의 가치관대로 교육받은 사람들과 교조적 체계에 충성심을 증명해 보인 사람들만이 특수 계급의 일원이 될 수 있습니다. 그 밖의 "우왕좌왕하는 무리"는 질서를 지키고 골치 아픈 문제에 뒤섞이지 않으면서, 방관자로서 실제 중요한 문제에서는 배제되어 있어야 합니다. 교육받은 특수 계급은 대중을 스스로의 문제조차 올바르게 결정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집단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대중이 "엉뚱한 판단"으로 실수를 저지를 기회 자체를 차단하는 정책을 쓰게 됩니다. 가령, 베트남 전쟁이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70%정도의 국민이 전쟁을 반대하는 "엉뚱한 결정"으로 치닫지 않도록 하는 정책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베트남 전쟁이 단지 실수였다는 정부의 공식 발표를 의심 없이 믿도록 드는 정책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우왕좌왕하는 무리"를 이처럼 엉뚱한 결정에서 보호하기 위해서, 개방사회의 특수 계급은 선전기법, 좋게 말하면 "홍보"에 더욱 열정하게 됩니다. 반면 독재국가에서는 당신 손에 망치를 쥐어주면서 "우왕좌왕하는 무리"를 지키게 만듭니다. 그 무리가 한발짝이라도 선을 벗어나면, 당신은 그들의 머리를 향해 망치를 사정없이 휘두릅니다. 물론 민주사회에서는 그처럼 폭력적인 수단으로 국민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대중의 마음을 교묘하게 통제할 수 있는 선전기법이 더욱 필요하게 됩니다. 그런데 지배계급에서 대중의 정신을 통제하려는 시도가 어찌 없겠습니까? 이 과정에서 학교는 중대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