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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MA/cinema

리바이어던, Leviafan


2015 02 18

리바이어던

감독 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

9.5



권력의 괴물에 대한 반성적인 관점. 영화 시작부에 얕게 흐르는 강물, 바위를 치는 파도, 파도를 밀어내는 바위, 대형 어업선으로 인해 옛것이 되어 바닷가 근저리에서 썪어가는 소형 배가 마치 이 영화의 모든 것을 드러내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 영화를 보고나면 그 모든 것이 영화의 전부임을, 수긍할 수밖에 없게 된다. 

지하철 역에서 화면의 앞이 아닌, 뒤에서 튀어나오는 주인공의 변호사 친구는 마치 불청객, 이방인 인듯한 느낌을 준다. 삶을 관조하듯 혹은 무력하게 바라보는 주인공의 부인과 모든 곳에 있는 청소년기의 아이, 배우지 못해 당할 수밖에 없는 주인공이 한적한 바닷가 선조부터 살아왔던 작은 땅에서 살아간다. 뿌옇고 안락해보이는 이 공간은 곧 시장의 호화별장이 지어질 땅이며 주인공은 누구와도 비슷하게 그 땅을 빼앗기고 싶지 않아 친구의 힘을 빌려 고소를 진행하지만 모든 것이 권력의 괴물이 되어버린 정부는 그의 하소연을 들어주지 않는다. 타인의 탄원을 무시해버리는 접수 직원, 아얘 건물 안으로 발도 못들이게 하는 경비원, 시장의 최측근인 법, 검찰계의 거물까지 이 모든 행동의 당위성에는 시장이라는 지역이 절대 권력이 끼어있다. 여기까지는 모든 영화가 해왔던 영화다. 우리조차도 그걸 알고 있다. 굳이 영화로 만들지 않는다하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영화에서 그들은 울거나 분노하며 정의를 부르짖지도 않는다. 시장의 약점을 잡아 더 많은 돈을 받아낸 뒤 그들은 사라질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영화 중반부까지 전개된다. 그러니까, 영화가 정말 하고픈 이야기는 그 뒤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당신은 주인공이 부당하게 자신의 땅을 빼앗기는 것을 보고 분노할 것이다. 그래서 뭐? 끝까지 남아서 혼자 싸워볼 텐가, 알콜 중독자가 되어서 인생을 쫑낼 것인가, 국가의 무소불위 권력을 비판할 것인가. 대신 영화는 주인공의 치부를 파고든다. 그의 가족사다. 인생을 무력하게 살아가는 부인은 그의 변호사 친구와 바람을 핀다.(아마도 옛날부터 아는 사이였겠지) 변호사와 친구의 우정은 순식간에 끝이 나고 한적한 바닷가 만큼이나 고요했던 가족에게도 커다란 파도가 들이친다. 끔찍한 광경을 목격한 아들은 바닷가로 달려나가 흐느껴운다. 커다란 괴물의 뼈가 묻힌, 물이 들어오지 않는 뭍에서 흐느껴운다. 누가 괴물을 낚시대로 건져올리려 하는가. 누가 저 아이의 내면에 메마른 땅과 괴물의 뼈만을 남겨두었는가. 아버지는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거의 무너져내려가는 교회에서 술에 취한 채 위를 올려다본다. 그는 구원자를 찾고있다. 아이들의 피워놓은 불의 재가 뚫린 건물의 천장 위로 날아간다. 밤 하늘은 깜깜할 뿐. 자연의 하늘은 아름다운가? 그저 까맣게 보일 뿐인가. 부인은 자살했는가?(자살하면서 바위에 부딪혔을 수도 있다) 혹은 권력의 개들이 그녀를 살해했는가? 영화는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감히 괴물을 낚시대로 들어올리려 했던 주인공만이, 변호사가 말한 그대로 '나는 사실만을 믿는다'는 법의 심판을 받는다. 결코 사실이 아니지만, 모든 정황이 사실인 세상을 살아가는 곳에서 법의 사실이라는 것은 과연 효력이 있는가? 그 모든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켜보는 주변인들, 우리는 정말 무의식적으로 권력에게 달라붙어 있는가? 당신들도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주인공이 땅을 빼앗길 것도, 모두가 침묵할 것도, 그리고 여태까지 그래왔듯 세상을 살아갈 것을 영화가 이야기하지 않아도 이미 당신들도 알고 있지 않는가, 영화는 법정씬에서 묻고있다. 

마지막 씬에서 권력의 모든 부품들은 교회에 모여 신부의 설교를 듣고있다. 신부의 아들이 주위를 둘러보다 교회의 천장을 올려다본다. 온화하고 인위적인 빛이 잘 설계된 교회의 천장을 감싸고있다. 신은 그저 껌껌한 아무것도 알 수 없는 하늘일 뿐이다. 그러나 권력은 그 까만 알 수 없는 것을 인위적으로 조절한다. 따뜻해서 그 광경이 훨씬 마음에 든다. 

그러니까 당신은 바위를 걷어내고 뻗어나가고 싶은 바다인가,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싶어하는 바위인가? 권력이라는 것이 탐욕스러운 시장의 얼굴만으로 대변할 수 있는가? 아이가 메마른 땅에서 괴물의 뼈를 보며 우는 것은, 바위 때문인가? 혹은 인생 깊숙히 파고든 소시민의 권태와 무력감인가. 파도는 바위를 넘어 메마른 땅을 적셔야만 하는가? 이 영화는 질문이다. 모두가 알고있는 것을 묻는다. 그렇지만 파도와 바위 모습처럼 우리는 모두 알고있는 것을 더이상 설명할 수 없는 지점에 이르러있다. 결국엔 그저 지켜볼 뿐이다. 괴물의 뼈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