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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MARK/humanities

시뮬라시옹/장 보드리야르

허무주의에 관하여
 허무주의는 더 이상 세기말적인, 음울하고, 바그적이며, 스펭글러적이고 음침한 색깔을 띠지 않는다. 허무주의는 더 이상 퇴폐주의의 세계관으로부터도, 신의 죽음으로부터 온 급진적인 형이상학과 그로부터 이끌어내는 모든 결과들로부터도 유래하지 않는다. 허무주의는 오늘날 투명성의 허무주의이며,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앞섰던 역사적 허무주의 형태들보다도 훨씬 근본적이고 훨씬 위기적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투명성, 이러한 부유는 해소 불가능한 체계의 투명성, 그리고 이 체계를 분석하겠다고 주장하는 모든 이론의 투명성이기 때문이다. 신이 죽었을 때는, 아직 이 사실을 알릴 니체가 있었다―영원과 영원의 시체 앞의 위대한 허무주의자, 그러나 모든 사물들의 스뮬라크르된 투명성 앞에서는, 파생실재성 속에서 세상의 물질주의적 혹은 이상주의적인 수행의 가장 앞에서는(신은 죽지 않고, 파생실재가 되었다), 더 이상 자신의 것들을 알아볼 이론적이고 비평적인 신이 없다.
 세계, 그리고 우리 모두는, 산 채로 시뮬라크르 속으로, 저지의 저주받은, 저주조차도 아닌 무관심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허무주의는 기묘한 방식으로 더 이상 파괴 속에서가 아니라 시뮬라시옹과 저지 속에서 완전히 실현되었다. 역사적으로도 허무주의는 자신이 그러했던 신화적이고 무대적이던, 격렬하고 활발한 환상으로부터, 시물들의 투명한, 거짓스럽게 투명한 기능으로 넘어갔다. 따라서 이론적으로 가능한 허무주의로부터 무엇이 남았는가? 그 곳에서 도전으로서, 내기로서, 무의 죽음이 다시 연기될 수 있을 어떤 새로운 무대가 다시 열릴 수 있겠는가?
 허무주의의 전 형태들에 대하여 우리는 새로운, 틀림없이 해결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
 낭만주의는 허무주의의 첫번째 커다란 출현이다:낭만주의는 계몽의 빛의 혁명과 함께 외양적인 질서들의 파괴와 상응한다.
 초현실주의, 다다주의, 부조리, 정치적 허무주의는 의미의 질서 파괴에 상응하는 허무주의의 두번째 커다란 나타남이다. 첫번째는 여전히 허무주의의 미학적 형태이며(멋부리기), 두번째는 정치적, 역사적, 형이상학적 형태이다(테러리즘).
 이 두 형태는 우리에게 부분적으로만 혹은 전혀 관계되지 않는다. 투명성의 허무주의는 더 이상 미학적이고 정치적이지 않다. 이것은 또 외양의 제거와ㅏ 의미의 제거로부터 최후의 불들 혹은 세상종말의 최후의 뉘앙스들을 빌려오지 않는다. 더 이상 세상의 종말은 없다(단지 불확실한 테러리즘만이 이를 반영하려 시도한다. 그러나 테러리즘은 더 이상 정치적인 것이 아니다. 테러리즘은 동시에 사라짐의 한 양식인 나타남의 한 양식만을 가지고 있을 따름이다:매체들―따라서 매체들은 거기서 뭔가가 연출되는 무대가 아니다―이것은 하나의 테이프, 궤적, 우리가 더 이상 그의 관객들, 수용자들조차도 아닌 구멍 뚫린 카드이다). 세상의 종말론은 끝났다. 오늘날 이는 중성과 무관심의 형태들의 자전이다. 나는 한 낭만주의, 어떤 중성의 미학이 있을 수 있지 않나 하고 생각할 여지를 남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남아 있는 모든 것은 사막처럼 황량하고 무관심한 형태들에 대한 미혹, 우리를 제거한 체계의 작동 자체에 대한 미혹이다. 따라서 미혹은(외양에 집착하였던 유혹과는 반대로, 의미에 집착하였던 변증법적 이성과는 반대로) 훌륭하게 허무주의적인 정열이다. 이것은 사라짐의 세상에 고유한 정열이다. 우리는 모든 사라짐의, 우리들의 사라짐의 형태들에 의하여 미혹되었다. 우수적이고 미혹된, 이것이 비의지적인 투명성의 시기에 일반적인 우리의 상황이다.

 나는 허무주의자이다.
 나는 19세기의 주요한 사실인 의미(재현, 역사, 비판 등)를 위하여 외양들이(그리고 외양들의 유혹이) 거대하게 파괴됨을 확인하고, 받아들이며, 짊어진다. 19세기에 근대성의 진짜 혁명, 이것은 외양들의 근본적인 파괴, 세상의 미혹으로부터 깨어나기, 해석과 역사의 격렬함에 세상 자신을 방기하기라 하겠다.
 나는 그 이전의 외양들의 파괴와 동격인, 의미의 거대한 파괴 과정인 제2의 혁명, 20세기의 혁명, 포스트-모더니티의 혁명을 확인하고, 받아들이며, 짊어진다. 의미로 두둘긴 자는 의미에 의하여 죽는다.
 변증법적인 무대, 비평적인 무대는 공허하다. 더 이상 무대가 없다. 그래서 의미의 치료법 혹은 의미에 의한 치료법은 없다. 치료법 자체도 일반회된 비구분 과정의 일부이다.
 분석 자체의 무대조차도 불확실하고, 우발적인 것이 되었으며 이론들도 부유한다(사실, 허무주의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허무주의는 여전히 절망적인 그러나 한정된 하나의 이론, 종말의 상상, 대파국의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분석은 아마도 그 자체가 의미의 거대한 빙결과정에서 결정적인 요소이다. 분석이 가져온 의미의 과도증가와 의미차원에서 분석들의 경쟁은, 세밀한 해부와 투명성으로 된 빙하기, 최근 약 100만 년의 제4기 작용 속에서의 그들의 동맹에 비교하여 보면 완전히 부차적인 것이다. 분석이 어떠한 방식으로 작용하건 간데, 분석은 의미의 빙결화를 향해서 작용하며, 분석은 시뮬라크르들과 비구분된 형태들의 자전을 돕는다는 것을 의식해야만 한다. 그래서 사막이 커진다.
 매체들 속에서 의미의 함열, 대중덩어리 속에서 사회적인 것의 함열, 체계의 가속기능 속에서 대중 덩어리의 무한한 성장, 에너지의 막다른 골목, 무기력점.
 포화된 세상의 무기력 운명과 무기력 현상들이(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가속된다. 정지된 형태들이 증식하고, 증식이 과도 성장 속에서 움직이지 않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이상발달의 비밀, 자기자신의 목표보다도 더 멀리 간 것의 비밀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고유한 목적성들의 파괴양식일 것이다;동일 방향으로 더 멀리, 너무 멀리 가기―시뮬라시옹에 의한 의미의 파괴, 과도 시뮬라시옹, 이상발달, 과도 목적성에 의하여 자기자신의 목적을 부정하기(빠끄섬의 조각상들, 갑각류)―이것 역시 암의 비밀이 아니겠는가? 증식에 대한 과잉 증식의 복수, 무기력 속에서 속도의 복수.
 대중덩어리들도 또한 가속화에 의한 이 거대한 무기력 과정 속에서 포착된다. 덩어리들은 모든 증식을 그리고 모든 의미의 과잉증가를 취소시키는 동시에 삼켜버리는 과잉증식의 과정이다. 덩어리들은 괴물 같은 목적성에 의하여 갑자기 단절된 회로이다.
 오늘날 미혹적이고 도취적인 것은 바로 이 무기력 점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다(따라서 변증법의 은밀한 매력은 끝났다), 다시 되돌아오지 못하는 점에까지 이른 체계의 이러한 비회귀성의 분석과 무기력점에 우선을 두는 것을 허무주의적이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나는 허무주의자이다.
 더 이상 생산의 양식이 아니라, 사라짐의 양식에 의해 강박적으로 사로잡혀 있는 것이 허무주의적이라 한다면, 그렇다면 나는 허무주의자이다. 사라짐, 소실, 함열, 줄어짐의 격노, 정치를 넘어선 전이정치가(실재의, 의미의, 무대의, 역사의, 사회적인 것의, 개인의) 사라짐 양식의 선택적인 영역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것은 그렇게까지 허무주의적인 것이 아니다. 사라짐 속에서, 사막적인, 불안한 돌발성의, 비구분적인 무차별의 형태 속에서는, 더 이상 비장, 허무주의의 비장함조차도 없다―이 여전히 허무주의의 힘을 만드는 신화적인 에너지, 근본성, 신화적인 부정, 극적인 예견, 이것은 깨어났을 때 느끼는 유혹적이고 향수적인, 홀렸던 때의 음조 그 자체를 아직 가지고 있는, 미망에서 깨어나기조차도 아니다. 이것은 아주 단순한 사라짐이다.
 사람들은 이미 이러한 사라짐의 근본성의 흔적을, 변증법에 대한 향수적인 연습으로서, 아도르노와 벤야민에게서 발견한다. 왜냐하면 변증법에 대한 향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분명 가장 교묘한 변증법은 단번에 향수적이다. 그러나 더 깊숙하게는, 벤야민과 아도르노에게서는 다름 음조가 있다. 체계 자체에 매달려 있는 우수의 음조, 모든 변증법을 넘어서는, 그리고 치유할 수 없는 우수 말이다. 오늘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아이러니컬하게도 투명한 형태들을 통하여 그 밑을 잡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체계들의 우수이다. 이 우수가 우리의 기본적인 열정이 되었다.
 더 이상 세기말의 영혼에게 찾아오는 우울이나 모호한 공허가 아니다. 또한 어떤 점에서는 모든 것을 파괴에 의하여 정상으로 만들고자 하는 허무주의나 원망의 정열도 아니다. 우수, 이것은 기능적인 체계에, 시뮬라시옹과 프로그램화, 그리고 정보화 체계에 기본적인 음조이다. 우수, 이것은 의미의 사라짐 양식에, 작동적인 체계들 속에서 의미의 기화양식에 내재하는 질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우수적이다.
 우수는 포화된 시스템들의 유대가 난폭하게 끊긴 결과이다. 선과 악을, 참과 거짓을 균형지을 희망이, 더욱이 동일한 질서의 몇몇 가지들을 서로 대치시킬 희망이, 힘의 관계와 내기의 더 일반적인 희망이 사라졌을 때, 체계는 너무나 강하다. 그것은 패권주의적이다.
 체계의 이러한 패권에 대항하여, 사람들은 욕망의 교활함을 고취시킬 수 있고, 일상에 대한 혁명적인 미생물학을 해볼 수 있고, 분자적인 일탈을 고취하거나 요리의 변호조차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체계가 아주 분명히 실패하도록 해야 하는 절대적인 필연성을 해결하지는 못한다.
 이것은 오직 테러리즘만이 한다.
 이것은 나머지를 지우는 반전행위이다. 마치 냉소적인 유일한 미소가 모든 담론을 지우듯이, 마치 노예의 경우 부인하기라는 유일한 섬광이 주인의 모든 힘과 즐김을 지우듯이.
 한 체계가 패권적일수록, 그의 이면들의 아주 조그마한 것에 의하여서 상상은 더욱 타격을 받는다. 도전은, 비록 극미하다할지라도, 연쇄적인 기력 쇠약의 이미지이다. 오직 곹옹의 척도 없는 이러한 최귀성만이 정치의 허무주의적이고 유대 끊긴 무대에서 오늘날 사건을 만든다.
 허무주의자라는 것이, 이 냉소와 격렬함의 근본적인 특색을, 체계가 자기자신의 죽음으로서 대답하라고 소환되는 이 도전을 패권적인 체계들의 견딜 수 없는 한계에까지 가지고 가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나는 이론상으로, 마치 타인들이 무기에 의하여 그러한 것처럼, 테러리스트이고 허무주의자이다. 진실이 아니라, 이론적인 격렬함이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방편이다.
 그러나 이것은 유토피아이다. 왜냐하면 어떤 근본성이라는 것이 여전히 있기만 한다면, 허무주의자가 되는 것은 좋은 것일 것이다. 마치 죽음이, 테러리스트의 죽음도 포함하여, 여전히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기만 한다면, 테러리스트가 되는 것이 좋은 것일 것처럼.
 그러나 바로 거기는 일들이 해결될 수 없도록 된 그곳이다. 왜냐하면 근본성의 이 활발한 허무주의에, 체계는 자기자신의 허무주의, 중성화의 허무주의를 내세운다. 체계 자체도 허무주의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체계는 모든 것을, 자신을 부정하는 것도 포함하여, 비구분과 무관심 속에 다시 부어넣는 힘이 있다.
 이 체계 속에서는, 죽음 자체도 그의 부재를 통하여 반짝인다. (볼론뉴 역, 뮌헨의 19월 대축제:죽음들은 무관심에 의하여 취소된다. 바로 여기가 테러리즘이 체계 전체의 비의지적인 공모자가 되는 곳인데, 정치적으로가 아니라, 테러리즘이 강요하는 무관심의 가속화된 형태 속에서 말이다.) 죽음은 더 이상, 환상적이거나 정치적인, 재현되어질 무대가, 의식적이건 격렬하게건, 연출되어질 무대가 아니다. 이것은 다른 허무주의의, 다른 테러리즘의, 체계의 테러리즘의 승리이다.
 더 이상 무대가, 사건들이 사실성의 힘을 취하도록 해주는 극소의 환상조차도 없다. 정신적 혹은 정치적인 연대감의 무대가 없다:칠레가, 비아프라가, 보트 피플이, 볼론뉴 혹은 폴란드가 우리에게 뭐가 중요한가? 이 모든 것은 텔레비전 화면 위에서 제거되기 위하여 온다. 우리는 결과 없는 사건들의 시대에 있다(그리고 결과없는 이론들의 시대에).
 의미에게 더 이상 희망이 없다. 그리고 이것은 다음을 말한다:의미는 죽음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위에서 의미가 자신의 일시적인 지배를 강요했던 것, 의미가 빛들의 지배를 강요하기 위하여 제거한다고 생각했던 것, 즉 외양들은 죽지 않는 것들이며, 의미 혹은 비-의미의 허무주의에 다치지 않는 것들이다.
 바로 여기서 유혹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