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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MA/classical cinema

분노의 포도, The Grapes Of Wrath

1940년 존 포드 작

―내 땅에서 떠나라구요?
어쨌든 날 탓하진 말게.
―그럼 누구 탓이죠?
알다시피 이 땅의 주인은 쇼니 랜드와 캐틀 컴퍼니야.
―쇼니 랜드와 캐틀 컴퍼니라뇨?
사람이 아니라 회사야.
―그래도 총알을 박아 줄 사장 놈은 있을 텐데.
사장님도 은행이 시키는 대로 할 뿐이야.
―좋아요, 은행은 어디죠?
털사, 하지만 매니저를 건드려서 뭐하나. 지시를 수행하느라 안 그래도 죽을 맛일 텐데.
―그럼 누굴 쏠까요?
잘 모르겠네.


분노의 포도가 전하는 메세지가 그리도 끔찍한데는 저 대화 속에 들어있다. 그들은 누구도 탓할 수 없는 자본주의 사회 아래에서 살고 있었다. 때문에 작가가 집중적으로 그려낸 품팔이의 모습은 더욱 처참했고, 사물에 빗대어 나타나는 자본은 친숙해서 비관적이었다.

아얘 허구의 적을 만들어내 쓸모없는 분노를 쏟아내게 하는 현대에 비하면 순진한 세계라고 해야할까? 아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건 없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를 향해서만 총을 겨누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경찰은 국가의 개니까 때려아 하고, 우리는 빨갱이니까 경찰이 때려줘야 한다. 얼마나 편리한 논리인가? 언제나 상대방을 탓하면 끝이니까. 그래서 현실은 더욱 끔찍하다. 사람들은 누군가를 욕하며 만족을 느끼고, 자신의 처참함을 느끼지도 못한다. 희망과 행운, 이미지를 숭배하고 카메라 뒤의 현실은 소외당한다. 그리고 그것이 '쿨'한 줄 안다. 스스로 이미지라는 가면을 쓰고 꼭두각시 노릇을 하고 있는데도 쿨하다고 생각한다. 영화 좀 작작봐라. 적어도 보니와 클라우드는 현실이 존나 재미없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존 스타인벡은 누군가는 자신을 값싼 감상주의라 이야기해도 그것이 값싼 희망보다는 가치있다는 것을 알았다. 스스로 꼭두각시가 된 작가나 감독들의 값싼 희망 좀, 그만 소비하자. 차라리 존 포드의 절망적인 희망을 보고 눈물이라도 흘리는 것이 낫다. 먼지 쌓인 눈 청소도 좀 해줘야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