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타락에 대한 이야기에는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점들이 있다. 낙원에는 생명의 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인식의 나무가 있었다. 알려진 바대로 인간에게는 이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이를 어기면 인간은 '죽게'된다. 그렇다면 인간은 원래 불사의 존재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 금기에서 주목할 것은 현대적 언어로 표현한다면, 실제적인 자기 모순(Selbstwiderspruch)이 포함되어 잇다는 점이다. 금지된 인식의 나무는 마치 "이 지시를 따르지 말라!"고 쓰여 있는 게시판과 같다. 이러한 지시에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 지시를 따르면 그 지시를 지킬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선과 악을 인식케 하는 금지된 나무도 마찬가지다. 이 나무가 다른 나무들과 함께 서 있음으로써 인간은 이미 선과 악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어쨌든 인식의 나무 열매를 먹는 행위가 나쁘다는 것을 안다. 선과 악을 인식하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기도 전에 금기를 통해 이미 선과 악을 구분하게 된다. 석과 악을 넘어선 삶―아직 식별에 대해 모르는 순진 무구한 삶, 그런 삶이 낙원이라면, 인간은 인식의 나무 열매를 따먹었을 때 자신의 순진 무구한 삶을 잃은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인간에게 금지된 바로 그때부터 천국에서의 삶을 잃은 것이다. 신은 금기를 지킬 것인가, 어길 것이가를 자유롭게 결정하도록 방치함으로써 인간에게 자유라는 선물을 주었다.
자유라는 의식이 작용하면 천국의 삶은 더 잇아 존재할 수 없다. 그 순간부터 의식의 근원적인 번뇌가 존재하게 한다. 의식은 이미 존재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넘어서 모든 유혹의 가능성을 내포하게 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인식의 나무 뒤에는 생명의 나무도 있었기 때문에, 의식은 무엇인가를 갈구하고 무엇인가에 동경을 품게 된다. 곁에 없는 그 무엇에게조차 유혹을 느끼게 된다. 자유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어떤 것에 대한 인간의 인식을 포함하지 않는다. 문제는 인식이 아직 자유에 필적할 만큼 성장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인간은 실패를 통해서도 배운다. 그래서 헤겔은 인간의 타락을 추락이 아닌, 성공의 시작이라고 해석한다. 헤겔 철학의 모든 프로그램을 포괄하는 문장이 이를 말해준다.
인식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상처가 되지만 인식함으로써 그 상처를 치유한다.
사실 신은 인간에게 선택할 권리를 줌으로써 그들의 위상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승격시켰다. 아마도 이 자유가 인간을 신과 닮게 만드는 요소이리라. 그래서 신은 인간이 타락한 모습을 본 후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보아라, 아담이 우리 중 하나의 모습이 되었다.
신 역시 악과 함께 사는 것을 배운다
다시 시작이다. 그러나 신은 변화했다. 인간 안에 악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신은 원리주의자에서 현실주의자가 된다. 신은 그의 창조물을 철저히 알게 되었고 인류학자가 된다. 신은 변화한다. 권력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자비로워졌다. 신은 인간을 이해하고, 인간에게 약속한다.
사람은 어려서부터 악한 마음을 품게 마련,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
홍수 후에 신에게도 이러한 원칙, 즉 이제 악과 함께 사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는 원칙이 적용된다.『구약성서』에 의하면, 악은 어쨌든 이제부터 인간의 상태(conditio humana)뿐만 아니라 신의 상태(conditio divina)에도 속한다. 아마도 신은 인간을 거울로 삼아 심지어 자기 안의 악한 부분을 발견하는 것까지 배웠을지 모른다. 이것을 역으로 표현하면, "인간은 스스로 자유의 가능성으로서 악을 발견하고, 악과 함께 공존할 수 있는 길을 찾음으로써 신을 발명했다고 할 수 있다".
악과의 교제가 신을 창조적으로 만든다. 신은 인간과 동맹을 체결한다. 그는 세상을 보존하겠다고 약속하고, 인간은 대홍수를 극복해낸 후에 신이 인간에게 내린 계멍(십계명의 이전 형식)을 지키겠다고 약속한다. 신은 인간에게 형벌권을 위임하고 심지어 살인과같은 가장 엄한 계명을 어겼을 때에도 인간이 재판하도록 한다.
타인의 피를 흐르게 한 자의 피는 인간에 의해 흘려져야 한다.
기억해야 할 것은 카인이 자기 동생을 죽였을 때, 신은 분명히 형벌권을 자기 수중에 남겨놓았다는 사실이다.
악에 대항하는 프로그램, 이성의 노동과 노동의 이성
외뷰 규칙을 인식하고 그것을 의식적으로 인간에게 적용시킨다면, 개인적으로나 전체적으로 삶은 성공할 것이다. 그러나 자연은 또한 끔찍한 면을 보여준다. 그에 대해서는 괴테의『베르테르』의 유명한 장면을 떠올리기만 하면 된다. 바로 이 젊음이는 아직 '자비로운'자연, 그것의 아름다움, 풍성함, 그의 살아 있는 숨소리에 빠진다. 그러자 갑자기 분위기가 바뀐다. 이 부드러운 "죽음과 생성"속에서 그는 이제 무시무시한, 먹고 먹히는 과정을 본다. 이 "끝없는 삶의 무대"가 그에게 "영원히 열려 있는 무덤"으로 변한다. 자연은 단지 "먹어 삼키는, 영원히 다시 씹어대는 괴물"일 뿐이다. 그러나 개인의 삶에 매여 자기 관점에서 두려워하며 전체를 보는 것이 이성의 의무는 아니며 이성은 개개인의 껍질 안에 있는 전체 의식이란 점을 깨닫는다면, 바로 이런 순간에 베르테르에게는 아니지만 이성적인 그 시대 사람에게서는 이성이 승리하게 된다. 그래서 이성은 경우에 따라서는 또한 개개인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규칙의 공범자가 된다. 스피노자는 "웃지도 말고, 한탄하지도 말고, 저주하지도 말고, 그 대신 이해하라"고 말한다.
필연적이란 것은 고통스럽다. 그러나 우리는 인식의 기쁨을 통해 고통으로 파헤쳐진 영역을 어루만진다.
(…)스피노자 이후로 발전된 극단적인 훕리주의는 인간적 삶의 긍정적인 가치들, 행운, 진리, 미덕이 논리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고, 그러므로 학문적으로 연구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 진실은 수학의 진실처럼 필연적이라고 여겨졌다. 여기에 생각의 자유는 없고, 기껏해야 생각할 자유가 있을 뿐이다. 수학을 피할 수는 있다. 그러한 자유는 인간이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 한번 거기에 발을 들여놓으면 논리와 진실의 강제성만이 있다. 수학에 적용되는 것이 왜 삶의 다른 분야에서는 적용되지 않겠는가? 우리는 이성을 지배할 만큼 자유롭다. 그러나 이성에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우리는 자신의 안녕을 위해서 이성의 진실에 지배받게 된다. 19세기의 과학에 대한 믿음은 그로부터 많은 결과를 가져온다.
권력을 향한 의지
힘찬 자연은 무의미와 허무주의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자연이 구체화하는 그것 자체에 모든 의미가 이미 있기 때문이다. 자연 자체가 의미이고 그래서 다른 곳에서 찾을 필요가 없다. 단지 자연은 자기 자신을 찾고 자신을 이해해야 한다. 약자를 보호하고 그들을 무의미로부터 보호하는 그러한 도덕은 강자에게는 필요 없다. 권력을 향한 의지는 고유한 도덕을 만들어낸다.
이제 이를 꽉 물어라! 눈을 떠라! 노를 움켜잡아라!―우리는 곧장 도덕을 넘어간다. 우리는 그쪽으로 행하를 감행하면서 짓밟고, 부순다. 그러면서 우리 도덕의 나머지를 파괴한다. 그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이제까지 단 한 번도 대담한 여행가와 모험가에게 그러한 심오한 통찰의 세계가 펼쳐진 적이 없었다.
니체의『도덕의 계보』은 이같이 심오한 통찰의 세계를 펼친다. 거기서 그는 도덕적인 선과 악의 구분을―배려, 이타주의, 헌신, 온화함, 겸손 등을 '선'그리고 그 반대인 것을 '악'이라 여긴다―약자나 '뒤진 자'의 한으로 돌린다. 그것은 바로 도덕의 문제에 있어 누가 규정할 힘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다. 선과 악이라는 종래의 구분은 아래서부터, 약자로부터 규정되었다. 좋다·나쁘다 라는 예전의 구분을 주시하면, 그렇다는 것이 분명해진다고 니체는 설명한다. 이전의 구분에서는 '뛰어난 것, 힘이 있는 것, 높이 서 있는 것, 고결한 것'이 '좋은 것'이라고 여겨졌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행동을 좋닥, 즉 첫째로 느끼는 것이다. 이에 반해 낮은 것, 저급한 것, 야비한 것을 의미하는 '소박한 것'이 나쁜 것으로 여겨졌다. 즉 좋다·나쁘다라는 구분은 서열의 차이를 의미하고 '위로부터' 평가된다. 선·악의 구분은 이러한 서열의 구분에서 도덕의 문제를 만들고 그러면서 평가 기준을 뒤바꾼다. 강함, 무자비함이라고 이해됐던 이전의 '선'은 이제 '악'이 되고, 이전에 '악'이라 생각했던 것은 '선'이 된다.
그것은 노예 도덕(Sklavenmoral)의 승리다. 친절, 겸손, 복종, 인내, 용서는 가장 고귀한 가치로 인정된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가치들은 자기 뜻대로 사는 것을 저지하기 때문에 자연스럽지 못하다고 니체는 말한다. 자기 뜻대로 사는 것이 양심으로 인해 뒷전으로 물러나는 것이다. 노예 도덕은 강자들에게 양심의 가책을 만든다. 결국 강자등릐 힘도 그렇게 바뀐다. 외부로 '풀지 못하는' 본느은 내부로 향한다.
(…)그러나 니체에서처럼 미학적인 관점이 도덕적인 관점을 지배하고 마침내 파괴하면, 후기의 니체를 결국 압도한 것처럼 파괴와 폭력의 환상에 다다를 수 있다. 히틀러가 이러한 난폭한 환상 중에 몇몇 개를 실현시킨 후, 이제 그것을 그냥 웃어넘길 수 없다. 니체의 미학적, 실존적인 실험실은 무죄였다고 할 수 없다. 니체는 심연이다. 그것을 니체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가장 명석했던 순간들에 그가 진지하게 말하고 있다고 오해하지 말도록 경고했다.
내 편을 드는 것은 필요치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반대로 낯선 식물들에 대한 약간의 호기심, 그것도 냉소적이고 비판적인 태도가 담긴 호기심으로 나를 대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태도다.
그가 자기 자신에 대한 '냉소적인 비판', 가장 심오하고 아름다운 현명함을 결국에 잃은 것이 니체의 개인적인 비극이다.
이 금기에서 주목할 것은 현대적 언어로 표현한다면, 실제적인 자기 모순(Selbstwiderspruch)이 포함되어 잇다는 점이다. 금지된 인식의 나무는 마치 "이 지시를 따르지 말라!"고 쓰여 있는 게시판과 같다. 이러한 지시에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 지시를 따르면 그 지시를 지킬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선과 악을 인식케 하는 금지된 나무도 마찬가지다. 이 나무가 다른 나무들과 함께 서 있음으로써 인간은 이미 선과 악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어쨌든 인식의 나무 열매를 먹는 행위가 나쁘다는 것을 안다. 선과 악을 인식하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기도 전에 금기를 통해 이미 선과 악을 구분하게 된다. 석과 악을 넘어선 삶―아직 식별에 대해 모르는 순진 무구한 삶, 그런 삶이 낙원이라면, 인간은 인식의 나무 열매를 따먹었을 때 자신의 순진 무구한 삶을 잃은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인간에게 금지된 바로 그때부터 천국에서의 삶을 잃은 것이다. 신은 금기를 지킬 것인가, 어길 것이가를 자유롭게 결정하도록 방치함으로써 인간에게 자유라는 선물을 주었다.
자유라는 의식이 작용하면 천국의 삶은 더 잇아 존재할 수 없다. 그 순간부터 의식의 근원적인 번뇌가 존재하게 한다. 의식은 이미 존재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넘어서 모든 유혹의 가능성을 내포하게 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인식의 나무 뒤에는 생명의 나무도 있었기 때문에, 의식은 무엇인가를 갈구하고 무엇인가에 동경을 품게 된다. 곁에 없는 그 무엇에게조차 유혹을 느끼게 된다. 자유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어떤 것에 대한 인간의 인식을 포함하지 않는다. 문제는 인식이 아직 자유에 필적할 만큼 성장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인간은 실패를 통해서도 배운다. 그래서 헤겔은 인간의 타락을 추락이 아닌, 성공의 시작이라고 해석한다. 헤겔 철학의 모든 프로그램을 포괄하는 문장이 이를 말해준다.
인식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상처가 되지만 인식함으로써 그 상처를 치유한다.
사실 신은 인간에게 선택할 권리를 줌으로써 그들의 위상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승격시켰다. 아마도 이 자유가 인간을 신과 닮게 만드는 요소이리라. 그래서 신은 인간이 타락한 모습을 본 후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보아라, 아담이 우리 중 하나의 모습이 되었다.
신 역시 악과 함께 사는 것을 배운다
다시 시작이다. 그러나 신은 변화했다. 인간 안에 악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신은 원리주의자에서 현실주의자가 된다. 신은 그의 창조물을 철저히 알게 되었고 인류학자가 된다. 신은 변화한다. 권력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자비로워졌다. 신은 인간을 이해하고, 인간에게 약속한다.
사람은 어려서부터 악한 마음을 품게 마련,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
홍수 후에 신에게도 이러한 원칙, 즉 이제 악과 함께 사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는 원칙이 적용된다.『구약성서』에 의하면, 악은 어쨌든 이제부터 인간의 상태(conditio humana)뿐만 아니라 신의 상태(conditio divina)에도 속한다. 아마도 신은 인간을 거울로 삼아 심지어 자기 안의 악한 부분을 발견하는 것까지 배웠을지 모른다. 이것을 역으로 표현하면, "인간은 스스로 자유의 가능성으로서 악을 발견하고, 악과 함께 공존할 수 있는 길을 찾음으로써 신을 발명했다고 할 수 있다".
악과의 교제가 신을 창조적으로 만든다. 신은 인간과 동맹을 체결한다. 그는 세상을 보존하겠다고 약속하고, 인간은 대홍수를 극복해낸 후에 신이 인간에게 내린 계멍(십계명의 이전 형식)을 지키겠다고 약속한다. 신은 인간에게 형벌권을 위임하고 심지어 살인과같은 가장 엄한 계명을 어겼을 때에도 인간이 재판하도록 한다.
타인의 피를 흐르게 한 자의 피는 인간에 의해 흘려져야 한다.
기억해야 할 것은 카인이 자기 동생을 죽였을 때, 신은 분명히 형벌권을 자기 수중에 남겨놓았다는 사실이다.
악에 대항하는 프로그램, 이성의 노동과 노동의 이성
외뷰 규칙을 인식하고 그것을 의식적으로 인간에게 적용시킨다면, 개인적으로나 전체적으로 삶은 성공할 것이다. 그러나 자연은 또한 끔찍한 면을 보여준다. 그에 대해서는 괴테의『베르테르』의 유명한 장면을 떠올리기만 하면 된다. 바로 이 젊음이는 아직 '자비로운'자연, 그것의 아름다움, 풍성함, 그의 살아 있는 숨소리에 빠진다. 그러자 갑자기 분위기가 바뀐다. 이 부드러운 "죽음과 생성"속에서 그는 이제 무시무시한, 먹고 먹히는 과정을 본다. 이 "끝없는 삶의 무대"가 그에게 "영원히 열려 있는 무덤"으로 변한다. 자연은 단지 "먹어 삼키는, 영원히 다시 씹어대는 괴물"일 뿐이다. 그러나 개인의 삶에 매여 자기 관점에서 두려워하며 전체를 보는 것이 이성의 의무는 아니며 이성은 개개인의 껍질 안에 있는 전체 의식이란 점을 깨닫는다면, 바로 이런 순간에 베르테르에게는 아니지만 이성적인 그 시대 사람에게서는 이성이 승리하게 된다. 그래서 이성은 경우에 따라서는 또한 개개인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규칙의 공범자가 된다. 스피노자는 "웃지도 말고, 한탄하지도 말고, 저주하지도 말고, 그 대신 이해하라"고 말한다.
필연적이란 것은 고통스럽다. 그러나 우리는 인식의 기쁨을 통해 고통으로 파헤쳐진 영역을 어루만진다.
(…)스피노자 이후로 발전된 극단적인 훕리주의는 인간적 삶의 긍정적인 가치들, 행운, 진리, 미덕이 논리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고, 그러므로 학문적으로 연구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 진실은 수학의 진실처럼 필연적이라고 여겨졌다. 여기에 생각의 자유는 없고, 기껏해야 생각할 자유가 있을 뿐이다. 수학을 피할 수는 있다. 그러한 자유는 인간이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 한번 거기에 발을 들여놓으면 논리와 진실의 강제성만이 있다. 수학에 적용되는 것이 왜 삶의 다른 분야에서는 적용되지 않겠는가? 우리는 이성을 지배할 만큼 자유롭다. 그러나 이성에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우리는 자신의 안녕을 위해서 이성의 진실에 지배받게 된다. 19세기의 과학에 대한 믿음은 그로부터 많은 결과를 가져온다.
권력을 향한 의지
힘찬 자연은 무의미와 허무주의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자연이 구체화하는 그것 자체에 모든 의미가 이미 있기 때문이다. 자연 자체가 의미이고 그래서 다른 곳에서 찾을 필요가 없다. 단지 자연은 자기 자신을 찾고 자신을 이해해야 한다. 약자를 보호하고 그들을 무의미로부터 보호하는 그러한 도덕은 강자에게는 필요 없다. 권력을 향한 의지는 고유한 도덕을 만들어낸다.
이제 이를 꽉 물어라! 눈을 떠라! 노를 움켜잡아라!―우리는 곧장 도덕을 넘어간다. 우리는 그쪽으로 행하를 감행하면서 짓밟고, 부순다. 그러면서 우리 도덕의 나머지를 파괴한다. 그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이제까지 단 한 번도 대담한 여행가와 모험가에게 그러한 심오한 통찰의 세계가 펼쳐진 적이 없었다.
니체의『도덕의 계보』은 이같이 심오한 통찰의 세계를 펼친다. 거기서 그는 도덕적인 선과 악의 구분을―배려, 이타주의, 헌신, 온화함, 겸손 등을 '선'그리고 그 반대인 것을 '악'이라 여긴다―약자나 '뒤진 자'의 한으로 돌린다. 그것은 바로 도덕의 문제에 있어 누가 규정할 힘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다. 선과 악이라는 종래의 구분은 아래서부터, 약자로부터 규정되었다. 좋다·나쁘다 라는 예전의 구분을 주시하면, 그렇다는 것이 분명해진다고 니체는 설명한다. 이전의 구분에서는 '뛰어난 것, 힘이 있는 것, 높이 서 있는 것, 고결한 것'이 '좋은 것'이라고 여겨졌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행동을 좋닥, 즉 첫째로 느끼는 것이다. 이에 반해 낮은 것, 저급한 것, 야비한 것을 의미하는 '소박한 것'이 나쁜 것으로 여겨졌다. 즉 좋다·나쁘다라는 구분은 서열의 차이를 의미하고 '위로부터' 평가된다. 선·악의 구분은 이러한 서열의 구분에서 도덕의 문제를 만들고 그러면서 평가 기준을 뒤바꾼다. 강함, 무자비함이라고 이해됐던 이전의 '선'은 이제 '악'이 되고, 이전에 '악'이라 생각했던 것은 '선'이 된다.
그것은 노예 도덕(Sklavenmoral)의 승리다. 친절, 겸손, 복종, 인내, 용서는 가장 고귀한 가치로 인정된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가치들은 자기 뜻대로 사는 것을 저지하기 때문에 자연스럽지 못하다고 니체는 말한다. 자기 뜻대로 사는 것이 양심으로 인해 뒷전으로 물러나는 것이다. 노예 도덕은 강자들에게 양심의 가책을 만든다. 결국 강자등릐 힘도 그렇게 바뀐다. 외부로 '풀지 못하는' 본느은 내부로 향한다.
(…)그러나 니체에서처럼 미학적인 관점이 도덕적인 관점을 지배하고 마침내 파괴하면, 후기의 니체를 결국 압도한 것처럼 파괴와 폭력의 환상에 다다를 수 있다. 히틀러가 이러한 난폭한 환상 중에 몇몇 개를 실현시킨 후, 이제 그것을 그냥 웃어넘길 수 없다. 니체의 미학적, 실존적인 실험실은 무죄였다고 할 수 없다. 니체는 심연이다. 그것을 니체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가장 명석했던 순간들에 그가 진지하게 말하고 있다고 오해하지 말도록 경고했다.
내 편을 드는 것은 필요치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반대로 낯선 식물들에 대한 약간의 호기심, 그것도 냉소적이고 비판적인 태도가 담긴 호기심으로 나를 대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태도다.
그가 자기 자신에 대한 '냉소적인 비판', 가장 심오하고 아름다운 현명함을 결국에 잃은 것이 니체의 개인적인 비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