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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MARK/humanities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이진경

 반면에 이른바 역사라는 것을 통해서 시간은 순환적인 것에서 직선적인 것으로 바뀐다. 이때 역사란 단지 과거에 일어난 일을 뜻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정치나 권력과 긴밀히 결부되어 하나로 '계열화된' 사건들의 집합이다. 그런 만큼 계얼적인 통일성을 구성하기 위해선 '필요한' 사건을 애써 찾아내기도 하고, 반대로 그 계얼의 통일성을 교란하는 사건은 배제하기도 하는 방식으로 구성되고 만들어지는 것이 역사다.
(…)이때 문명이나 문화라는 것은 성과의 축적이요, 지나간 시간의 누적을 뜻하는 것이다. 그렇게 누적된 시간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된다. 예를 들면 대륙의 중앙을 정복한 사건, 황제로 등극한 시점을 결코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황제는 자신의 권력을 무로 되돌리는 순환적 시간을 결코 허용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제 그들은 그 시간을 불가역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한다. 연대기적인 기록으로서 역사, 그리고 그것을 누적되고 축적되는 것으로 만듦으로써 현존하는 권력과 문명을 필경 무로 돌리고말 순환적 시간과 싸우는 일종의 보호막인 셈이다. 드보르는 말한다.

 연대기는 권력의 불가역적 시간의 표현이자, 시간의 임의적 진행으로부터 선행했던 것을 보호하는 도구이다. 왜냐하면 시간의 이런 불가역적 방향은 모든 특수한 권력의 몰락과 더불어 붕괴하고, 그런 뒤에는 순환적 시간의 무심한 망각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따라서 역사의 시간은 순환성을 깨는 직선적 시간의 형식을 취한다. 역사의 소유자들은 시간에게 하나의 의미, 즉 일정한 의의를 지니는 하나의 방향성을 부여했다고 할 수 있다. () 이 경우 시간의 문제는 권력의 문제, 그래서 삶의 리듬을 둘러싼 투쟁 내지 지배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에서 신화적 시간, 종교적인 시간과 역사의 시간은 하나의 동일한 시간으로 결합되고 통일된다. 기독교에서 시간은 신에 의한 세계의 창조라는 명확한 시점을 갖고, 원죄와 타락으로 오염된 그 세계는 최후의 심판이라고 하는 종점을 향해서 달리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시간은 분명한 시작과 끝을 갖는 그러한 직선적인 시간이 된다. 시작을 가지며, 어떤 목적 내지 종결을 향해 달리는 시간, 그것은 바로 역사의 시간이기도 하다. 여기서 신화는 역사와 융합되고, 신화적 시간은 순환성을 벗어나 직선적인 것이 된다. 유명한 중세 사가인 르 고프는 이렇게 쓰고 있다.

 역사가 시작과 끝을 갖는다는 것, 이것은 매우 중요한 주장이다. 이러한 시작과 끝은 실증적인 동시에 규범적이고, 역사적인 동시에 신학적이다. 그렇게 때문에 중세 서양의 모든 연대기는 창조, 즉 아담에서 시작된다. ……그것은 최후의 심판을 사실상의 결론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중세 사제들과 이들의 청중에게 시간은 역사이고 이 역사는 하나의 방향을 가진다. 그러나 역사의 방향은 몰락이라는 하강선을 따른다.

 여기에서 시간이 실증적인 것은 그것이 역사적 실재성을 주장한다는 점과 결부되어 있다. 그것은 이제 신화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 역사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 시간이 규범적이라는 것은, 종말이 신의 '심판'으로 끝나기에, 역사적 현존이란 그 심판을 향한 과정이 되고, 언제나 그 심판하는 최정점에서 소급되는 판단에 의해 삶의 방식과 규범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현재는 언제나 기다리고 있을 그 최후의 심판 아래, 그 심판관의 시선 아래 놓여 있는 과거인 것이다.
 여기서 기독교의 시간개념 안에서 선/악이라는 범주가 그 근저에서부터 작용하고 있음을 명확하게 볼 수 있다. 그것은 선한 자와 악한 자가 다른 최후를 맞는 시간이고, 그런 만큼 그 최후라는 미래에 의해 규정되는 다른 과거이며, 선/악에 의해 규제되는 현재인 것이다. 선이 지배하는 시간과 악이 지배하는 시간, 그리고 그것의 교차와 대립, 이것이 규범으로서 기독적인 시간이다. 이 점에서 이는 앞서 말한 '좋은/나쁜'이란 범주에 의해 규제되는 시간과 매우 다른 성격을 갖는다. 최후의 심판을 담보로 무엇인가를 금지하고, 선/악의 범주를 통해 어떤 행위를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을 위축시킨다. 세속적인 악의 시간이 지속될수록 그것은 사람들을 오그라들게 만들 것이 틀림없다.




2)근대적 공간-기계의 형성

(1)공장-기계
 ()이에 대해 맑스는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나태와 방탕 또는 낭만적인 자유의 환상을 근절하기 위해서, 나아가서 구빈세의 경감과 근로정신의 조장 및 매뉴팩처에서의 노동가격 인하를 위해서', 자본의 충실한 대변인인 우리의 에카르트는 공적 자선에 의지하고 있는 이러한 노동자를 하나의 '이상적 구빈원'에 가두어두자는 든든한 수단을 제안한다. '이러한 집은 공포의 집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자본의 혼이 아직 꿈만 꾸고 있던 1770년의 피구휼민을 위한 공포의 집이 불과 몇 년 뒤에는 매뉴팩처 노동자 자신을 위한 거대한 '구빈원'으로 나타났다. 그것이 바로 공장이었다.

 이런 점에서 맑스는, 공장은 '완화된 감옥'이라는 푸리에의 말에 동의를 표시한다. 이는 공장이란 수용소나 감옥과 마찬가지로, 사회의 다른 영역과 단절된, 그리하여 거기와는 다른 방식으로 노동자들의 행동을 강제하고 통제할 수 있는 공간-기계다. 여기서 쉽게 추론할 수 있는 것은, 공장이라는 공간-기계는 이미 다른 공간과 구별되는 공간적 '구획'이며, 그 구획을 통해 이전에 소통되던 공간에 절단과 불연속을 도입한다는 것이다. 이 절단이 노동자들의 노동을 자본가들이 바라는 방식대로 강제함으로써 그 결과는 착취/채취하려는 것임은 앞서 인용문이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공장이라는 공간-기계는 공간 자체를 특정한 방식으로 분할하고 구획하는 방식을 포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