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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MARK/humanities

자본주의 경제산책/정운영

 세계화 이데올로기는 적어도 두 가지 측면에서 이전의 경우와 다르다. 그 하나는 침략과 복종의 가장 원시적인 표출인 영토의 분할과 합병이 없다는 점이다. 영토 존중은 각국의 정치적 독립을 형식적으로 인정하는 행위이겠으나, 세계화의 경제적 내용은 고전적 제국주의 시대의 식민지 수탈보다 덜하지 않다. 시장 확보 야욕으로 출발한 19세기의 제국주의는 즉시 영토 분할로 발전했으며, 그 영토강점에 입각한 식민지 수탈은 주로 천역 자원과 노동력에 집중되었다. 그리고 또 식민지 통치의 편의와 그 유지의 필요에서 수탈의 강도에 대해 일정한 자제가 있었다. 그러나 세계화 시대의 시장 분할과 통합은 그 대상이 기존의 상품과 자본은 물론 용역, 기술, 노동, 환경, 거래 규칙으로 대거 확대될 뿐만 아니라 외세 개입을 규제하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존재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고전적 영토 분할이 현대의 시장 분할로 형태를 바꿈으로써, 세계화는 고전적 제국주의의 폭력적 모습마저 가리게 되었다. 그 폭력성이 상품과 자본의 '경쟁력'과 노동 시장의 '신축성' 따위로 옷을 갈아입었기 때문이다. <월간 평론>지상에 전개된 세계화 논쟁의 한 답변을 통해 엘렌 우드는 세계화 시대에 노출되는 자본과 국가 관계의 변모를 이렇게 설명한다.

 세계화는 무엇보다도 신자유주의와 결탁한 무자비한 국가 행동, 즉 세계 시장에서 단순히 개별 기업만이 아니라 국민 경제 전체를 위해 '경쟁력'과 '신축성'을 제고하려는 목적으로 시행되는 각종 정책을 의미한다. 이 정책들은 자본이 원하기 때문이 아니라, 통합된 경쟁적 세계경제에서 수익성 극대화를 위해 자본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시행된다.


 전통적인 정부의 임무를 국제기구에 위임함으로써 국가 고유의 기능이 무장 해제되는 '국가의 국제화' 현상에 주목하자. 일례로 스페인 노동자가 마드리드의 자국 정부 대신 브뤼셀의 '다국적' 유럽 관리와 협상을 벌일 때, 그 수고와 비용이 한층 더 드는 것은 물론이고 현안 해결의 가능성조차 더욱더 멀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자본의 세계적 결탁은 국제기구를 손쉽게 통제할 수 있지만, 노동의 세계적 연대로 이에 대항하기는 아직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국가의 국제화에서 발생하는 피해는 애초에 자본가 계급만큼 단결하지 못한 노동자 계급의 몫일 수밖에 없다. 과세와 규제를 피해 버뮤다나 케이맨 제도로 도피한 자본은 실제로 '초국적 형태'를 취하기도 한다. 자본에 국적이 없다는 말은 강대국 자본일수록 한층 실감나게 들린다. 그들에게 조국은 곧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초국적 형태의 금융자본이 국적을 버렸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참으로 얼토당토않은 오해이고 착각이다. 그들이 버린 것은 국가라는 활동 무대이고, 대신 얻은 것은 세계 시장이기 때문이다.

 요즘 외환 거래에 자주 등장하는 헤징(hedging) 기법은 본래 환율 변동에 따르는 위험, 즉 환거래 손실을 분산할 목적으로 고안된 수단이다. 위험을 분산하려면 그 위험을 대신 감당할 상대가 필요하다. 헤지 펀드는 이런 계산을 바탕으로 출현한 국제 투기자본이다. 위험이 따르더라도 수익만 많다면 투기를 마다 않는 모험 자본이 헤지 펀드이다. 바로 그런 신조로 국제 금융계를 종횡무진 휘젓고 다니는 이들의 만행에 세계의 금융 질서는 지금 홍역을 앓고 있다. 투기에 따르는 위험 부담 때문에 헤지 펀드는 국물만 있으면 일제히 몰려들고, 국물이 떨어질 기미가 보이면 즉시 내빼는 한탕주의적 모험에 탐닉한다. 그 국물의 원천은 환율, 금리, 주가 등 다양하다. 시장이 불안할수록 이들의 투기 행위는 단기화하고, 그 이탈 또한 신속하다. 건강한 경제에서는 '정상 이윤' 이상의 국물이 나올리 없으므로, 이들은 마치 사체를 보고 몰려드는 하이에나처럼 파탄의 징조를 보이는 허약한 경제를 노리기 십상이다. 동아시아 경제가 빈사의 상태를 헤매자, 이들 헤지 펀드는 치고 빠지는 수법으로 거액을 챙겼다. 그런 사정을 뻔히 보면서도 국제통화기금은 금융 자유화를 외치면서 이들의 탈선에 제동을 걸지 않았다. 제임스 토빈 교수는 심각한 외환 위기에 빠진 한국과 다른 아시아 국가들이 "자본 이동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하는 미국 주도의 결딴난 국제 환율 제도의 희생자"라고 동아시아 외환 위기의 책임을 자본 이동의 무책임한 '자유'에 돌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