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조금만 더 근본적으로 들여다보면 국가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불신의 뿌리는 집단 행위에 대한 불신이라 할 수 있는데, 거기에는 이론적 문제점이 있다.
첫째, (국가나 노조와 같은) 제도들이 항상 ―혹은 압도적으로― 자유로운 개인들 간의 사회적 계약의 결과라는 주장은 정확한 것이라 할 수 없다. 예로부터 인류는 특정한 집단의 구성원으로 존재해 왔다. 때문에 '자유로운 계약 주체'라는 개념은 오히려 자본주의 질서의 결과라고 할 수 있는데, 그 경우 제도가 개인들 간의 계약의 결과라고 주장하기보다는, 개인들이 제도의 결과라고 주장하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둘째, 집단적 행위보다 개인적 행위를 선호하는 신자유주의적 관점은 정치적으로 어설프기 짝이 없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자주 '이익 집단'을 공격한다. 그러나 그 이익집단들은 기실 신자유주의자들이 절대적으로 신성시하는 개인들의 연합일 뿐이다. 그런데 일관된 자유주의자라면 개인이 좋아하는 집단에 들어갈 자유를 박탈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더욱이 신자유주의자들은 사기업 등 특정한 이익집단의 정당성은 승인한다. 그렇다면 사기업 등 일부 이익집단은 정당하고 다른 이익집단은 부당하다는 이야기인데, 이 같은 판단의 기준은 과연 무엇인가. 결국 신자유주의자들의 반집단주의적 담론은 그들이 반대하는 일부 이익집단에 대항하는 정치적 의제를 은폐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
우리는 대다수 신자유주의 이론이 (경제 주체와 사회마다 다르고 시간에 따라 다른) 인간 행위에서의 동기의 복잡성, (누가 주인이고, 누가 대리인인지 불분명한) 현대 정치 형태의 복잡성, 정책 형성 및 수행 과정에서 정당화의 중요성, 복잡한 현대 경제에서 집단적 관리의 필연성 등을 고려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정치에 대한 신자유주의자들의 극단적으로 단순한 개념은 그들의 주장을 기껏해야 남을 오도하는 것으로, 최악의 경우에는 사기로 만들어 버린다.
만약 신자유주의자들이 '최소 국가' 수준을 제외한 (국가 개입 등과 같은) 모든 집단적 행위를 사실상 금지하는 방향으로 법률을 개정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정말 믿고 있다면, 그들은 지나치게 천진난만한 것이다. 그렇게 믿고 있지도 않으면서 그런 주장을 끊임없이 내놓는다면, 그것은 그들이 대중적인 담론 뒤에 은밀한 정치적 의제를 숨기고 있는 것이다. 즉 그들은 노동자 계급과 여러 '진보적' 운동이 20세기에 거둔 성과들을 그 이전으로 되돌린다는 목표를 갖고 있는 셈이다.
신자유주의자, 특히 오스트리아 학파의 영향을 받은 학자들이 중앙 계획 경제가 복잡하고 끊임없이 변동하는 현대 경제를 운영하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은 아니라고 주장한 점에서는 옳았다. 그러나 이 정도의 견해를 기반으로 모든 형태의 국가 개입은 필연적으로 실패한다고 결론 내린 것은 지나친 비약으로 다음과 같은 점에서 오류이다. 첫째, 전시나 우주 개발 계획처럼 압도적으로 중요한 목표가 존재하는 상황에서는 중앙 계획 경제가 시장보다는 더 잘 작동한다. 둘째, 중앙 계획 경제만큼 정보 수집 능력이 절실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중앙 계획 경제만큼 정보 수집 능력이 절실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중앙 계획 경제만큼은 효율적인 또 다른 형태의 국가 개입이 있다. 바로 동아시아 스타일의 산업 정책 경제이다. 하이에크가 말한 것과는 반대로 제3의 길은 있다. 아니, 수많은 제3의 길이 있는 것이다.
보다 폭넓게 보면 신자유주의적 신념, 즉 최소 국가주의자를 제외한 어떤 집단적 조직도 경제에서 긍정적 역할을 해 낼 수 없다는 견해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다. 첫째, 기업만 하더라도 결국 한 무더기의 계약들로 구성된, 순수하게 개인적인 조직이 아니라 수많은 '위계적'이고 '관계적'인 요소들을 가지고 있는 조직이다. 더욱이 현대 경제에는 광범위한 '네트워크'가 존재하는데, 이는 순수한 계약적 관계가 아니라 신뢰와 연대에 기반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신자유주의자들이 가정하는 세계는 타인과는 일시적인 교류를 맺을 뿐인 고립된 개인들로 득시글거리고 있다. 하지만 이런 세계는 결코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할 수도 없다.
1.1 결코 신성하지 않은 출발
신자유주의 연구 프로그램에 내재한 가장 큰 모순은 신자유주의 독트린이 신고전학파 경제학과 이른바 오스트리아 자유주의 전통 간의 정략결혼으로 성립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신고전학파 경제학이 신자유주의에 지적 정통성을 부여―경제학계에서 신고전학파의 지배적 지위를 상기하라―하는 반면, 신자유주의 옹호자들의 능란한 정치적 수사는 오스트리아 자유주의 전통으로부터 한 수 배운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신고전학파와 오스트리아 자유주의는 적어도 이 같은 지적 전통들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달라도 너무 다른 이론이라는 것이다. 하이에크가 신고전학파를 그토록 가혹하게 비판했던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고전학파와 오스트리아 자유주의와의 수상한 정략결혼이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오스트리아 자유주의 전통에는 신고전학파 경제학이 자체적으로 꿈도 못 꾸는 대중적 호소력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 누가 (신고전학파가 강조하는) '파레토 최적'을 수호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겠는가. 반면 (오스트리아 자유주의자들이 외치는) '자유'와 '기업가 정신'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겠다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자유주의 전통은 '존경 받을 만한' 집단으로부터 그 지적 정통성을 승인 받지 못하고 있었다. 때문에 신고전학파 경제학이 달고 다니는 '과학'이라는 후광이 필요했던 것이다.
신고전학파의 입장에서는 오스트리아 자유주의 전통과 동맹한 덕분에 대중적 설득력을 한층 강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상당히 컸다. 신고전학파는 동맹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이론에 담긴 개입주의적 색채를 스스로 억압해야 했다. 오스트리아 자유주의 전통은 국가 통제주의를 강경하게 반대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첫째, (국가나 노조와 같은) 제도들이 항상 ―혹은 압도적으로― 자유로운 개인들 간의 사회적 계약의 결과라는 주장은 정확한 것이라 할 수 없다. 예로부터 인류는 특정한 집단의 구성원으로 존재해 왔다. 때문에 '자유로운 계약 주체'라는 개념은 오히려 자본주의 질서의 결과라고 할 수 있는데, 그 경우 제도가 개인들 간의 계약의 결과라고 주장하기보다는, 개인들이 제도의 결과라고 주장하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둘째, 집단적 행위보다 개인적 행위를 선호하는 신자유주의적 관점은 정치적으로 어설프기 짝이 없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자주 '이익 집단'을 공격한다. 그러나 그 이익집단들은 기실 신자유주의자들이 절대적으로 신성시하는 개인들의 연합일 뿐이다. 그런데 일관된 자유주의자라면 개인이 좋아하는 집단에 들어갈 자유를 박탈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더욱이 신자유주의자들은 사기업 등 특정한 이익집단의 정당성은 승인한다. 그렇다면 사기업 등 일부 이익집단은 정당하고 다른 이익집단은 부당하다는 이야기인데, 이 같은 판단의 기준은 과연 무엇인가. 결국 신자유주의자들의 반집단주의적 담론은 그들이 반대하는 일부 이익집단에 대항하는 정치적 의제를 은폐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
우리는 대다수 신자유주의 이론이 (경제 주체와 사회마다 다르고 시간에 따라 다른) 인간 행위에서의 동기의 복잡성, (누가 주인이고, 누가 대리인인지 불분명한) 현대 정치 형태의 복잡성, 정책 형성 및 수행 과정에서 정당화의 중요성, 복잡한 현대 경제에서 집단적 관리의 필연성 등을 고려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정치에 대한 신자유주의자들의 극단적으로 단순한 개념은 그들의 주장을 기껏해야 남을 오도하는 것으로, 최악의 경우에는 사기로 만들어 버린다.
만약 신자유주의자들이 '최소 국가' 수준을 제외한 (국가 개입 등과 같은) 모든 집단적 행위를 사실상 금지하는 방향으로 법률을 개정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정말 믿고 있다면, 그들은 지나치게 천진난만한 것이다. 그렇게 믿고 있지도 않으면서 그런 주장을 끊임없이 내놓는다면, 그것은 그들이 대중적인 담론 뒤에 은밀한 정치적 의제를 숨기고 있는 것이다. 즉 그들은 노동자 계급과 여러 '진보적' 운동이 20세기에 거둔 성과들을 그 이전으로 되돌린다는 목표를 갖고 있는 셈이다.
신자유주의자, 특히 오스트리아 학파의 영향을 받은 학자들이 중앙 계획 경제가 복잡하고 끊임없이 변동하는 현대 경제를 운영하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은 아니라고 주장한 점에서는 옳았다. 그러나 이 정도의 견해를 기반으로 모든 형태의 국가 개입은 필연적으로 실패한다고 결론 내린 것은 지나친 비약으로 다음과 같은 점에서 오류이다. 첫째, 전시나 우주 개발 계획처럼 압도적으로 중요한 목표가 존재하는 상황에서는 중앙 계획 경제가 시장보다는 더 잘 작동한다. 둘째, 중앙 계획 경제만큼 정보 수집 능력이 절실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중앙 계획 경제만큼 정보 수집 능력이 절실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중앙 계획 경제만큼은 효율적인 또 다른 형태의 국가 개입이 있다. 바로 동아시아 스타일의 산업 정책 경제이다. 하이에크가 말한 것과는 반대로 제3의 길은 있다. 아니, 수많은 제3의 길이 있는 것이다.
보다 폭넓게 보면 신자유주의적 신념, 즉 최소 국가주의자를 제외한 어떤 집단적 조직도 경제에서 긍정적 역할을 해 낼 수 없다는 견해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다. 첫째, 기업만 하더라도 결국 한 무더기의 계약들로 구성된, 순수하게 개인적인 조직이 아니라 수많은 '위계적'이고 '관계적'인 요소들을 가지고 있는 조직이다. 더욱이 현대 경제에는 광범위한 '네트워크'가 존재하는데, 이는 순수한 계약적 관계가 아니라 신뢰와 연대에 기반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신자유주의자들이 가정하는 세계는 타인과는 일시적인 교류를 맺을 뿐인 고립된 개인들로 득시글거리고 있다. 하지만 이런 세계는 결코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할 수도 없다.
1.1 결코 신성하지 않은 출발
신자유주의 연구 프로그램에 내재한 가장 큰 모순은 신자유주의 독트린이 신고전학파 경제학과 이른바 오스트리아 자유주의 전통 간의 정략결혼으로 성립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신고전학파 경제학이 신자유주의에 지적 정통성을 부여―경제학계에서 신고전학파의 지배적 지위를 상기하라―하는 반면, 신자유주의 옹호자들의 능란한 정치적 수사는 오스트리아 자유주의 전통으로부터 한 수 배운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신고전학파와 오스트리아 자유주의는 적어도 이 같은 지적 전통들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달라도 너무 다른 이론이라는 것이다. 하이에크가 신고전학파를 그토록 가혹하게 비판했던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고전학파와 오스트리아 자유주의와의 수상한 정략결혼이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오스트리아 자유주의 전통에는 신고전학파 경제학이 자체적으로 꿈도 못 꾸는 대중적 호소력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 누가 (신고전학파가 강조하는) '파레토 최적'을 수호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겠는가. 반면 (오스트리아 자유주의자들이 외치는) '자유'와 '기업가 정신'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겠다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자유주의 전통은 '존경 받을 만한' 집단으로부터 그 지적 정통성을 승인 받지 못하고 있었다. 때문에 신고전학파 경제학이 달고 다니는 '과학'이라는 후광이 필요했던 것이다.
신고전학파의 입장에서는 오스트리아 자유주의 전통과 동맹한 덕분에 대중적 설득력을 한층 강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상당히 컸다. 신고전학파는 동맹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이론에 담긴 개입주의적 색채를 스스로 억압해야 했다. 오스트리아 자유주의 전통은 국가 통제주의를 강경하게 반대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