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폴 사르트르
이렇게 어디서나 있는 책임 때문에 인간은 전적으로 자유이다. 심지어 어떠한 선택도 하지 않는 선택 자체 역시 선택이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사르트르는 전쟁중 자신을 상담해줄 사람을 찾는 한 학생의 예를 든다. 학생은 그가 나치와 싸우기 위하여 영국에 가서 레지스탕스운동에 참가할 것인가 아니면 파리에 남아서 자신의 병든 노모를 돌볼 것일가라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 사르트르는 “당신은 자유이다. 그러므로 선택하라”라는 것을 상기시키면서 학생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강조한다. 그는 또 다음과 같은 점을 함께 지적한다. 즉 그가 가서 충고해 줄 누군가를 찾는다면, 예를 들어 목사를 선택한다면, 어느 목사를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달리 말해서, 그 목사가 무엇을 충고할지를 알면서, 이런저런(예를 들면 레지스탕스에 또는 부역에 동정적인) 목사를 선택하는 것이다. 충고자를 선택한다는 것은 이미 그런 선택에 자신이 위임되어 있다는 것을 함의한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선택의 현상학이다.
선택의 불가피성에 대한 자각은 불안의 경험을 수반한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선택할 때에 불안으로 가득 차 있다. 즉 어떤 절대적인 양식하에서 우리의 행동을 보장해주고 정당화시켜줄 수 있는 객관적인 가치의 기준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자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본래적 실존은 불안의 불가피성을 받아들이고, 그것으로부터 도피하기를 추구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더욱이 우리의 불안은 우리 행위의 선택이 개별적인 자기 자신을 위한 선택일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을 위하는 것이라는 사실에서부터 나온다(여기서 사르트르는 “우리의 행동이 모든 다른 개인에 대해서도 역시 보편화될 수 있는 그런 방식으로 행위해야 한다”는 칸트의 언명을 지지한다). 반대로 비본래적인 개인은 만인에 대해서가 아니라 개인에 대해서 정당한 것이 보편적이라는 환상을 지지한다. 일련의 자연법이 미리 부여해 놓은 전통적인 초월적 가치체계의 이념을 부정하고, 사르트르는 단호하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불안, 그것이 바로 행위의 조건이다. 왜냐하면 행위라는 것은 복수의 가능성과 이들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을 가정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이 선택되어졌다는 그것 때문에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안다(실존주의와 인도주의)
그러므로 실존주의는 불안의 현상학을 포함한다.
사르트르의 예를 따르면 나는 똑같은 인물을 동시에 지각하고 상상할 수 없다. 내가 지금 만일 파리의 이 방에 있는 어떤 사람을 지각한다면, 동시에 베를린에 있는 그를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역도 또한 성립한다. 따라서 사르트르는 상상을 지각의 부정으로 정의하고 있는 셈이다. 왜냐하면 무엇인가를 상ㅅ아하기 위하여 즉 지금 우리에게 부재한 것을 현전시키기 위하여 우리는 (지각에서) 현전한 것을 결여해야만 한다. 즉 무엇의 심상은 부재한 것의 현전이다.
사르트르는 다음과 같이 선언함으로써 지각의 지향적 작용에 대한 현사학적 기술을 결론짓는다. 즉 인간은 존재론적으로(지각적으로 현전한 실재성의 사실성에 의해서) 세계 중의 존재(a being-in-the-midst-of-the-world)이기 때문에 제한받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새로운 미래의 가능성의 투기에서 현실세계를 부정하는 초월적인 상상력에 의해서) 세계를 넘어서는 존재(a being-beyond-the-world)이기에 자유이다. 사르트르는 다음과 같이 쓴다. “의식이 상상할 수 있기 위해서는 세계로부터 … 세계에서 도망가야 한다. 그것은 자유이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상상할 수 있기 때문에 초월적으로 자유롭다.”고 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의식이 상상할 수 없다고 한다면, 현재 순간의 현실성에 완전히 매몰되어 이러한 현실성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사르트르는 “모든 실존은 자신을 정립하는 그 순간, 그 자신을 초출한다”고 주장한다. 즉 지금 있지 않는 어떤 것을 지향하면서 지금 향하여 있는 것을 넘어선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그의 유명한 인간에 대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즉 인간은 무엇인 존재가 아니고 무엇이 아닌 존재이다. 내가 나 자신을 지금의 나로 인식하자마자, 나는 이미 나의 과거의 자아와 미래의 자아가 아닌 것으로 자신을 상상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현재 자아에는 항상 과거와 미래의 부재가 붙어다닌다. 그러므로 상상한다는 것은 내가 나 자신을(여기 그리고 지금에 주어진 어떠한 것도 아닌)무와 자유로 구성하는 시간적 행위이다.
사르트르가 제안에 따르면, 이 창조적인 상상력은 일종의 미적인 마술로서 이해될 수 있다. 비록 우리는 우리의 심상이 자기 투기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들은 마치 실재인 것처럼 마술적으로 상호작용을 계속한다. 만일 내가 박물관에서 세종대왕의 초상화를 보고 있다면, 나는 이 임금이 죽은 지 오래되었고 또 장사지냈다는 것도 안다. 그 초상화의 상상의 입술과 코, 눈 그리고 이마가 나의 감정에서 지각상유화에서 현전한 선과 색깔을 내가 ‘마술적으로’ 비실제적인 왕의 심상으로 옮겨 놓는 그런 방식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미적인 경험에서, 나는 죽은 왕이 내 앞의 여기에 있다고 상상한다.
분명히 우리가 보는 것은 그림이 아니라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여기에 없다고 선언한다. 우리는 그림에 의한 이미지로써만 그를 가까이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단지 의식이 초상화와 원래 그 사람 사이에서 상상적으로 정립해놓는 주술적인 관계만을 볼 뿐이다. 세종대왕은 부재하는 동시에 현존해 있다.(상상의 심리학)
유사한 양식으로 부두교의 주술을 행했던, 또는 눈에 보이는 상과 함께 왕족들을 장시지냈던 원시인들 역시 (그들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현전의 모습을 간직한다면 그들이 불멸한다고 생각하면서) 주술적 상상의 세계에 살았다. 또는 동굴의 벽에 암소를 그림으로써 사냥의 풍성을 가져온다고 생각했던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사르트르는 우리가 여전히 이런 상상적 미신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사진 또는 친한 사람을 생각할 때의 예로서 설명한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 그 사진에 찍힌 사람의 눈이 사랑하는 사람의 눈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는가? 주술적인 상상력은 결코 진기한 고대적인 현상일 수만은 없다. 그것은 인간의식의 본질적인 구조이다. 20세기 서구 사람들은 결코 들소를 그리거나 검은 주술을 행햐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영화관에 가고, 소설을 읽고, 텔레비전을 보고 그리고 꿈을 꾼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인간은 원하는 것을 상상하기 위하여 세계를 부정한 기본적인 필요성을 항상 절감한다. 우리는 계속해서 사실을 허구로 바꿀 것이다.
폴 리쾨르
리쾨르는 실명사(positive term)로 이러한 비판에 동의한다. 왜냐하면 세계내 존재로서 나의 존재록적 자기 이해는 삶의 기록을 해독하는 과정에 의해서 회복될 수 있기 때문에(그것은 실존의 다양한 기호에 대한 해석학적 비판을 통해서 가능하다) 그것은 항상 바라는 것, 즉 어떤 전적인 또는 절대적인 의미에서 완성될 수 없는 해석의 투기로 남아 있다. 우리 자신이 피할 수 없는 다양한 해석에 노출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면서, 우리는 사유하는 자아(Cogito)의 주도권을 주장하는 의식의 철학이 허위의식임을 자각하게 된다. 매개하는 해석의 과정을 버리고 무엇이 되고자 하는 바람을 자기 의식의 직접성으로 환원하는 것은 그것을 실체화하는 것이다. 무엇이 되고자 하는 바람은 결코 해석된 존재로서 자신의 지위를 포기할 수 없다. 영원한 해결책을 강구하려고 하는 의식의 경향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리쾨르는 1)현상학적 해석학의 투기와 2)회의의 세대가(맑스, 프로이트 그리고 니체)에 의해서 개진된 ‘허위의식’에 대한 비판을 결합한다.
이러한 세 명(맑스적, 프로이트적 그리고 니체적인)이 개진한 해석학의 모델들을 리쾨르는 의식의 직접적 이해가 사상된 의미의 차원이 존재한다는 것을 상기시켜준 사람들로서 받아들인다. 예컨대 프로이트는 어떻게 ‘무의식적인’ 의미가 우리의 주도적인 의식의 배면에 자리하면서 조직화되고 구조화되어 있는지를 폭로함으로써 사유하는 자아가 주재한다고 하는 편견을 벗겨주었다. 유사하게 니체 역시 우리의 이른바 초시간적인 영원한 가치와 이성의 개념에 숨겨진 ‘권력에의 의지’의 전략에 의해서 사실상 ‘계보학적으로’ 어떻게 규정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었다. 맑스의 이데올로기 비판은 인간실존의 의미가 어떻게 종종 해벙된 주체의 범위를 벗어나서 사회 역사적 지배력에 의해서 규정되는가 하는 점을 보여주었다. 리쾨르에 따르면 이러한 의심의 대가들은 우리는 우리 밖에(outside of ourselves) 존재하는 자신을 처음으로 인식할 때 우리의 존재론적인 ‘무엇이 되고자 하는 바람’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이 세 사람 모두 자신에게 투명하지 않은 의미는 사실상 드러나는 동시에 숨는 수수께끼와 같은 과정으로 있다는 것을 인식했었다. 그래서 리쾨르는 다음과 같이 쓸 수 있었다.
우리가 만일 맑스의 이데올로기론, 니체의 윤리계보학 그리고 프로이트의 이념과 환상의 이론을 모두 함께 이해하는 데에 성공한다면, 우리는 그 이후로 현대지성에게 제시된 문제, 즉 허위의식의 문제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종교비판, 리쾨르 선집).
리쾨르는 의심의 해석학이 새로운 문화비판을 가능하게 만들었다고 믿었다. 분명히 그것은 ‘탈신비화’하는 부정의 해석학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정확히 인식론상의 오류에서 비롯되는 주관적인 맥락이 아니라, 우리의 사회적 담론 일반의 차원에서 허위와 환상을 다루었다. 그래서 맑스는 허위의식을 계급투쟁의 반영으로, 니체는 강자에 대한 약자의 한 맺힌 원한으로, 프로이트는 문화적 금기에 의해서 억압된 인간욕망의 역사로 보았다. 리쾨르는 이 세 사람 모두가 지배·욕망·의지의 숨겨진 전략을 해독하기 위하여 기성의 문화관례를 탈신화화하는 공통된 ‘해석학적 의심(her-meneutic doubt)'을 그 추동력으로 하였다고 관찰하였다.
자크 데리다
반면에 플라톤은 일반적으로 글에 대하여 상당한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자아 대 자아라고 하는 대화론적 직접성은 (또는 타자에게 자아가 자기 자신을 대하는 것처럼 직접적으로 현전해 있다고 하는) 음성중심주의의 모델과 결별하면서, 글은 우리에게 자신으로부터 소외된 의미를 드러낸다. 기호로 각인된 의미는 원저자의 의도에 대하여 자율성과 독립성을 갖는다. 그것은 원래의 자기현전과는 동떨어진 의미를 갖는다. 즉 그것은 원래 의도했던 건과는 매우 다르게 해석될 여지를 가지고 잇다. 그것은 원래의 자기현전과는 동떨어진 의미를 정립한다. 의미가 소외되고 있다고 하는 증거는 쓰여진 기호가 저자가 없을 때에도, 심지어는 저자가 죽었을 대에도 능기를 계속한다는 점에서 볼 때 명백한다. 그래서 플라톤은 글을 부모살해범으로 비난한다. 쓰여진 기호는 원래 그들을 낳았던 부모를 죽여버리는 불법적 자손과 같다. ‘산종’에서 데리다는 플라톤이 ‘파이드로스’에서 글에 대한 적개적인 평가를 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정교한 해체적 분석을 시도한다. 이 대화록에서 플라톤은 글이 말을 소외시키는 것에 대하여 결고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단 말이 글로 쓰여진다면 그것을 이해하거나 이해 못하는 사람에 의해서 어느 부분이 곡해될 수 있다. 또 그들은 누구에게 대답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그리고 만일 그것들이 잘못 다루어지거나 남용된다면 그것들을 보호해줄 어떤 부모도 없다.(파이드로스).
플라톤은 쓰여진 그들을의 이러한 불법성에 대하여 구어의 특성을 대비시킨다.
다른 종류의 말, 즉 말이 글보다 훨씬 우수하다. 그리고 또 더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다. 즉 같은 가문의 아들이지만 합법적인 적자이다. 나는 영혼에 각인된 지적 대화를 원한다. … 쓰여진 말이 단순히 모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살아 있는 말을(파이드로스).
플라톤은 자주 파르마콘(Parmakon: '치료제‘라는 뜻과 ’병균‘이라는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애매한 낱말)이란 용어를 글의 속성에 결부시켰다. 데리다는 이 낱말이 ’치료제‘ 와 ’병균‘ 둘 모두를 의미하는 애매한 말이라는 사실에 우리가 주목해주기를 바란다. 플라톤에 있어서 글은 화자의 원래 의도에서 신뢰성의 바탕이 되는 자기에의 현존을 제거시키는 나쁜 병균으로 취급되고 있다. 그것은 화자의 원래 의도에서 부모의 보호를 벗어나게 하여 잘못에 노출시킴으로써 의미를 저자 외부에 놓아둔다. 그러나 의미는 역살적이게도 치료의 역할도 한다. 의미가 저자의 의도와 똑같이 남을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반복됨으로써 망각에서 다시 회상되기 때문이다. 데리다가 지적한 것처럼, 플라톤적 형상(Eidos)의 자기동일성은 그 힘이 거듭거듭 반복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이 점에 왜 그가 진리를 회상(anamnesis)으로써 말하고 있는가 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원래 의도된 의미를 회상할 수 있도록 해주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 바로 글이다. 왜냐하면 글은 화자의 의도를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반복시킴으로써 잊혀졌던 원래 의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글은 직접적 자기현전으로서 말을 소외시키는 ’병균‘인 동시에 원래 표현되었던 그때 그 장소라는 한계를 넘어서서 그것의 지속성을 유지시켜주는 ’치료제‘이기도 하는 이중역할을 하는 것이다.
데리다는 ‘형상’, ‘로고스’와 같이 가장 중요한 초시간적인 현전의 범주들이 사실은 그 반대되는 가치와 상호공속적인 관계에 있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플라톤적 형이상학을 해체하고자 한다.
페르디난드 드 소쉬르
소기(여자 형제라는 심적 개념)을 의미하는 능기(예:'sister'에서 6가지의 영어 음소의 결합)를 선택하는 데 자연적 동기가 없다고 주정하는 것은 이 선택이 각 발언자에게 맡겨진다는 것을 함축하지는 않는다. 반대로 소쉬르는 기호는 언어공동체에서, 한 번 확정되념 개인이 의도적으로 그것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고 말한다. 언어의 체계가 개인의 발화에 의해 결정된다기보다는 오히려 언어의 체계가 개인의 발화를 결정한다. 소쉬르 언어 모델의 이런 측면은 구조주의운동 전체의 중심 전제가 되었다. 그것은 인간의 의식이나 천재성이 의미를 창조한다는 낭만주의나 실존주의 이론을 근본적으로 거부한 것이다. 예를 들면 각 개인의 실존은 각 개인이 결정하는 것이라는 사르트르의 견해에 대해, 구조주의자는 각 개인의 빠롤의 의미는 랑그라는 집단적이고 개인에 앞서는 체계에 의해 규제된다고 대답한다. 이러한 견해의 대립은 현대 대륙철학에서 가장 심각하게 격론을 일으킨다.
그러나 소쉬르의 구조언어학은 단순히 실존주의와 관련하여 논란되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또한 언어의 기원에 관한 형이상학적·신비적 이론의 논박을 포함한다. 이런 태도는 ‘사물의 기호’, ‘자연언어 … 신의 은총으로 허락된 신비’에 대한 뵈메의 믿음에 진기하게 수렴된다. 이 견해에 따르면 자연은 신이 쓴 필적으로, 아담이 신이 창조한 동물들에 고유한 이름을 붙일 대 처음 명료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신적인 창조자의 원초적 서명(signature)에 상응하는 각 자연적 소기에 대한 자연적 능기가 있다는 전제에서 연유한다. 언어를 형이상학적으로 탐구하는 것은 세계와 사물 사이에 존재하는 원초적 상응관계를 다시 발견하기 위하여 일상생활의 진술(discourse)의 혼돈을 통찰하는 것이다.
소쉬르의 독창성은 언어의 의미를 언어 자체 안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논증했다는 것이다. 언어의 의미는 언어와 독립하여 존재하는 어떤 중요한 실재―그것이 신의 형이상학적 창조이든 인간의 주관적 의식이든―로부터 파생되는 것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구조주의의 제일 목표는, 기호는 신적 혹은 자연적 경험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순수한 형식체계 안에서 임의적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이 견해는 야콥슨과 언어형식주의 학파에 의해 입증된다. 그들은 또한 구조주의 안에서 소쉬르 이후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소쉬르는 기호는 일차적으로 세계 속에서 사물과 관계하지 않고, 언어체계 안에서 다른 기호들과 관계한다는 것을 긍정한다. 바꿔 말하면 언어는 신이나 인간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니고, 언어 자체로부터 생겨났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주 그러한 확신을 읽을 수 있다. 그조주의는 신과 인간의 죽음을 선언한다. 그러므로 구조주의는 이신론(Deism)과 휴머니즘 모두를 거부하는 것이다.
자크 라캉
라캉은 미국 심리학은 행태주의자이건 휴머니스트이건 결국은 무의식의 수수께끼 그림 논리를 무시한다고 주장한다. 미국 심리학자들의 의도는 무의식적 잠재의식(id)의 뒤집어진 욕망으로부터 의식적 자아를 되찾아서 미국식 생활방식에 적응하도록 격려하는 것이다. 미국의 정신분석학은 혼돈이나 모순 없이 그들의 사회적이고 경제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훌륭한 시민을 만들어내는 것이 목적이다. 그리고 이것은 후기 프로이트의 보다 자아중심적인 심리학(예를 들면 ‘자아와 잠재의식’에서 명료하게 나타난)을 단순하게 파악함으로써. 개인을 사회적 환경에 적응시키려는 관행을 정당화한다. 그러나 라캉은 ‘꿈의 해석’과 ‘일상생활의 심리학’ 같은 초기작품으로부터 언어학적이고 구조주의적 정신분석학의 모델을 취한다. 여기에서 그는 자아심리학에 대한 근본적인 대안을 발견했다. 그는 프로이트의 가장 근본적인 바전은 인간영혼의 보다 언어학적 차원에 대한 이런 조형적인 연구들에서 개인적 자아의 의식적 진술(그는 이것을 소쉬르의 ‘빠롤’에 비유한다)보다는 이드의 무의식적 언어에(이것은 소쉬르의 ‘랑그’에 비유한다) 중요성을 부여한 것이러고 주장했다. 프로이트의 유명한 명제로 돌아가서, “이드가 있는 곳에, 거기에 내가 있게 될 것이다”[wo es war, so will Ich werden(where the Id is, there I will be)] 이런 읽기―이것은 때로는 소크라테스의 이전의 것으로 언급되는데―는 프로이트의 구절에 대한 정통적 해석을 뒤집어버린다. 정통적 해석은 자아가 승리하여 이드를 대치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라캉은 자아는 깨뜨려질 수 없으며, 그 스스로 자신을 보전하며, 스스로 자신을 정당화시키려 하는 정신관리(soul management)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는 심리학의 정통적 견해를 거부한다. 정신분석학의 진정한 기능은 자율적인 정체성이나 전인격성(total personality)으로서의 개인에 대한 휴머니즘적 관념에 도전하는 것이고, 우리를 언어의 무의식적 심층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라고 라캉은 논증한다. 언어의 무의식의 심층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의미의 구조적 놀이는 의식적 차원에서의 모든 자아형성에 앞서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자의 사명은 환자의 나르시스트적인 정체성을 공고히 해주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뒤집어 엎어서 그가 분열된 주체라는 것을 깨우쳐 주는 것이다. 환자의 자기정체성에 대한 이ㅡ식적 영상은 무의식의 욕망에 의해서 계속적으로 탈중심화 되어야 한다. 라캉은 ‘개체들’은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분열된 개체들’만이 존재한다고 주정했다.(…)라캉은 미국인들이 ‘비정상적인’ 시민을 열심히 일하고 자기성취를 위해 노력하는 기능적이고 주류적이며 조용한 현대사회의 정상적인 시민으로 바꾸기 위해 정신분석학을 이용하는 것을 철저하게 비판한다. 그래서 라캉은 좌파적 지식인으로 숭앙되었다. 그는 구조주의적 맑스주의자인 루이 알튀세르에게 호의적인 인정을 받았을 뿐 아니라, 1968년 학생들은 그의 저작을 선진산업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는 새로운 비판적 무기로서 보았다.
롤랑 바르트
바르트는 신화는 형식적 고려에 종속되는 것일 뿐 아니라 역사적 고려에 종속된다고 보는 소쉬르보다 한걸음 더 나아간다. 그는 기호의 사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논리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조건이라고 주장한다. 바르트에게 신화는 어떤 우주적 무의식의 영원한 원형이나 의식의 신비스런 영감이 아니고, 애초의 사물의 본성에 속한 것도 아니다. 신화는 사회적 실재를 특별한 사회적 목적으로 기능하게 하는 언어로 바꾸어버리는 구조적 전환이다.
따라서 바르트는 신화학의 전혀 새로운 정의에 도달한다. 즉 신화학은 대중의 의식을 지배하는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진술들에 봉사하는 기호학의 일부분이다. 신화는 사회의 모습을 겉으로 드러나도록 하는 공적인 매스미디어, 국가언론이나 라디오, 다른 의사소통의 관례에 의해 이데올로기적 의미를 가지게 되는 형식상의 관념이다. 바르트는 모든 곳에서 신화를 찾는다. 사실상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세계(말하자면 어떤 이데올로기적인 함의라는 관점에서 정형화되지 않는 사건과 사물들)에서 의미없는 영역을 만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그는 주장한다. 바르트는, ‘바닷가’라는 겉으로 자연적인 것같이 보이는 것에 대한 우리의 지각조차도 표지판, 의복, 광고문, 볕에 그을린 색깔 등의 기호학적인 메시지에 둘러싸여 있다고 말한다.
신화는 이중적인 의미로 작용한다. 신화는 이미 존재하는 기호(그것이 쓰여진 문장이건 사진이건 뉴스이건 간에)를 출발점으로 삼는데, 그 기호는 어떤 이데올로기적인 의미를 채용함으로써 다시 충전된다. 이런 의미에서 신화는 이미 존재하는 언어를 다시 활동하게 하는 숨겨진 언어이다. ‘신화학’의 마지막 장을 ‘오늘의 산화’라고 붙였는데, 바르트는 ‘파리마치’라는 잡지의 표지에 대해 유명한 분석을 한다. 그 표지는 프랑스 제복을 입은 흑인이 눈을 치켜뜨고 프랑스 국기를 흔들고 있다.(…) '흑인 병사는 프랑스식 경례를 하고 있다‘고 읽힌다. 그러나 이 표면적 의미 뒤에는 의미의 둘째 층이 숨어 있는데, ’프랑스는 거대한 식민지를 거느린 제국이고 모든 프랑스의 자녀들은 인종에 관계없이 프랑스 국기 아래 충성한다‘는 것이다. 첫재 층의 기호(흑인이 경례하는 국기)는 둘째 충의 ’능기‘로서 가능하기 시작하고, 그것의 ’소기‘는 프랑스인의 애국심이 군사적 식민주의와 공존할 수 있다는 이데올로기의 메시지일 때, ’신화‘의 기호학적 체계는 성립하게 된다.
타자치다가 팔목 아작나는 줄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