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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MARK/humanities

불량배들/자크 데리다

신이여, 무엇을 말해서는 안 되는가? 도래할 어떤 언어로 말인가?

1.결국 첫 번째 질문이 여기 있습니다. 그것은 다음 질문입니다. 즉, 사람들은 민주정치에 관해 민주적으로 말할 수 있을까요? 또(는) 말해야만 할까요? 민주정치를 민주적으로 말한다는 것, 그것은 민주정치에 관해서, 민주정치를 이해할 수 있게 일의적으로, 분별력 있게 말하기 위해 이 단어를 또는 이 단어로 만드는 문장등을 이해할 수 있는 그 누구에 의해서도 이해되도록 하는 것일 것입니다. 저는 항상 오스틴의 이 격언을 반복하는데, 하나의 단어는 결코 의미가 없기 대문입니다. 단지 문장만이 의미가 있지요. 그러나 제가 ‘민주정치를 민주적으로 말한다는 것, 그것은 민주정치에 관해 민주정치를 이해할 수 있게, 임의적으로, 분별력 있게 말하기 위해 이 단어를, 또는 이 단어로 만드는 문장들을 이해할 수 있는 그 누구에 의해서도 이해되도록 하는 것일 것입니다“라고 반복할 때, 저는 이미 규약들과 조건들을 배가시켰습니다.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그 누구에 의해서도 이해되도록 하는 것 등‘을 말할 때, ’할 수 있다‘라는 단어는 어떤 역량, 능력, 힘 크라토스, 크라테인의 가능성을 향해, 그러나 또 어떤 권리의 가능성을 향해, 정당한 허가 또는 어떤 법(nomos)이나 정의(dike)에 의해, 어떤 허락된 힘에 의해, 어떤 정당한 권력에 의해 정당화된 허가의 가능성을 향해 동시에, 또는 차례로 신호를 보낼 수 있습니다. ”누구나 민주정치 속에서 민주정치라는 단어나 개념의 일의적 의미를 이해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 그것은 anybody 또는 anyone can이나 may 또는 should be able to, should have the right to 나 ought to 등을 의미합니다. 저는 이미 그리스어, 불어, 영어를 좀 전에 말했지만 독일어로 일백여 가지 가능한 다른 보기들 가운데 이 보기만을 취해본다면, gewalt(권력)<독>라는 단어와 walten(통치)<독> 이라는 어휘는 폭력으로서의 힘, 권력의 폭력, 또 정당한 권력과 권위, 정부, 통치, 명령, 법, 질서를 향해 신호를 보냅니다. 이 모든 의미는 동등하지 않습니다. 이미 수많은 혼란들이 우리를 노려보고 있습니다. 힘으로서의 권력과 법으로서의 권력 사이에서, 법과 정의의 사이에서, 크라토스와 노모스 또는 크라토스와 디케 사이에서, 사실과 권리 사이에서 확증적 발화, 명령적 발화, 규범적 발화, 수행적 발화 사이에서 차이와 다양한 뉘앙스의 유령은 그 차이들, 뉘앙스들의 주제에서 접히고, 펼쳐지고 다시 접힙니다. 만약 적어도 누구나 민주정치가 의미하는 바의 그 의미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면, 민주정치 안에서 그 주제에 대한 명증성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며, 이해가능하게 되어야 할 것입니다.

(...) 힘, 권력, 권리, 법 그리고 정의의 개념들을 넘어 이렇게 요구되고 가정되었던 까닭이 종종 실현불가능한 번역들을 관통해 더 많은 언어로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면, 부정할 수 없는 유일한 특권을 이용하는 듯한 그리스어에 대한 준거 역시 우리를 조금도 안심시킬 수 없습니다. 먼저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그리스어에서 민주정치는 그 자체에 부적합한 개념이며, 모든 번역을 위태롭게 하고, 모든 애매함과 자가면역적인 모순들로 열릴지 모르는 현기증 나는 의미론적 심연을 자신의 중심에 파놓은 어휘이기 때문입니다. 또 유럽에서, 또 유럽 밖에서 25세기보다 더 오래 전부터 어떤 그리스 민주정치나 아테네의 민주정치라는 패러다임 없이, 패러다임의 영향을 미쳐온 변화들의 역사와 정치적인 것의 역사를 관통해서 우리가 문헌론적이거나 의미론적이거나 어원론적인 친자 관계 속에 그 어떤 연속성도 진실로 보장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민주정치를 민주적으로 말하기 위해서는 ‘민주적인’이라는 단어에 어떤 순환적인 수행적 발화와 무장된 수사학의 정치적 폭력을 통해 의미를 강제하고, 그렇게 때문이 사람들이 허구에 의해 지평에서 획득된—혹은 적어도 가능하고 필요한—것으로 가정하는 척하는 합의를 낳아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불량국가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불량국가는 없다는 것을 이해해야 할까요?

따라서 분명히 이 큰 회전의 끝에 사람들은 “최강자의 이성(불량국가들은 존재하는가?)” 이라는 제목하에 제기된 질문에, “예”라고 대답하고 싶어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예, 불량국가는 존재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지만 사람들이 생각하고 말하는 불량국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항상 더 많은 불량국가가 존재합니다. 그것이 바로 어떤 첫 번째 급선회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마지막 급선회, 최종 급선회가 있습니다. 어떤 반회전, 혁명 또는 어떤 회전식 문의 최종 급선회가 있습니다. 그것은 어디에 있습니까? 사람들은 우선 모든 국가가 불량국가인 바로 거기, 깡패정치가 국가 주권의 크라티 자체인 바로 거기, 불량배만 존재하는 거기에는 더 이상 불량배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싶어하겠지만, 저는 정당한 만큼 손쉬운 이 같은 유혹에 저항할 것입니다. 더 이상 불량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Plus de voyous). 사람들이 그것을 말하거나 배가시키는 것보다 항상 더 많은 불량배들이 존재하는 바로 거기에 더 이상 불량ㅇ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를테면, ‘불량배’라는 단어의의미와 효력을 쓸모없게 만들 이 내재적 필요성을 넘어 불량배가 더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불량배가 더 적어지는 그때부터, 또 ‘Plus de voyous(더 많은 불량배들, 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불량배들)’, ‘Plus d'Etats coyous(더 많은 불량국가들, 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불량국가들)’에 또 모순적인 두 가지 의미가 있게 되는 그때부터 이 명칭을 끝내고, 그 명칭의 시기를 제한할 또 다른 필요성, 또 미국과 그 나라의 몇몇 동맹국들이 행할 수 있었던 그 빈번하고, 역행적이며 강박적인, 그 명칭에의 의존을 제한할 또 다른 필요성이 존재합니다.

제 가설은 이렇습니다. 한편으로 이 시대가 안전보장이사회를 기초한 상임이사국들인 과도하게 무장한 초강대국인 두 나라가 국가상호 간의 핵 공포 정치의 어떤 균형을 통해 세계 질서가 유지되도록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앞에서 말한 냉전을 종식시키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 비록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계속하서 이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의 종식은 9월 11일(그 어떤 개념도 상응하지 않는 어떤 사건, 그 때문에 게다가 양쪽의 계산된 이 강력한 매체에-의해-과장된 공적이고 정치적인 사건으로—그러므로 사람들은 그 앞에서 끝없이 동적심만을 표할 수 있을 따름인 희생자들의 모든 비극을 넘어—구성된 어떤 사건을 경제적으로 참고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날짜)을 예고했다기보다는 오히려, 과장해서, 매체에-의해-과장해서 확고히 했었습니다. 우리를 안심시켰던 불량국가들의 고발을 유의미하게, 또 유용하게 만들어왔던 모든(논리적 의미론적 수사학적 법적 정치적) 장치가 세계 무역센터의 두 탑들과 함께 가시적으로 붕괴되었습니다. 소비에트연합의 붕괴(‘붕괴’인 이유는 바로 전제들 중 하나, 두 탑들의 붕괴인 최초의 회전들 중 하나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이후, 1993년부터 클린턴은 권력의 자리에 오른 후 결국 불량국가들에 대해 복수와 제재의 정치를 시작하며, 자기 나라는 예외 조항(51항)을 적합해보이게끔 이용할 것이라고, 제가 인용해보면 미국은 “multilaterally when possible but unilaterally when necessary(가능한 한 다각적으로, 필요하다면 일방적으로)” 행동할 것이라고 유엔을 향해 선언하게 됩니다. 이 선언은 한 번 더 반복되었고 확인되었습니다. 유엔 대사였을 때, 매들린 울브라이트에 의해, 또는 국방부 비서관이었던 윌리엄 코언에 의해서 말입니다. 후자는 결국 자국의 사활이 걸린 문제일 때는 언제나 불량국가에 대해 미국이 군사적으로, 일반적으로(따라서 유엔이나 안전보장이사회의 사전 승인 없이) 개입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알렸습니다. 그리고 제가 인용해본다면 그는 사활이 걸린 문제를 “주요 시자들, 에너지 공급 그리고 전략 자원들에의 접근 금지를 보장하는 것”으로, 또 어떤 ‘자국 재판권’에 의해 사활이 걸린 문제로 결정될 수 있는 모든 것으로 표현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므로 미국 내부에서 또 그 누구의 조언도 없이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생존 이익’이 이 같은 이익에 반하는 정치를 하는 모든 국가를 공격하거나 불안정하게 하거나 파괴하는 것이 옳고, 정당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명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주권의 이 같은 일방성, 주권이 이 같은 비배분, 민주적이고 정상적이라고 가정되는 유엔 기관의 이 같은 침해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이 최강자의 이성이 옳다고 인정하기 위해서는 공격적이고 위협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앞의 국가가 불량국가로 행동한다고 그때 공포해야만 할 것입니다. “rogue states란 미국이 그렇다고 하는 모든 국가이다”라고 리트워크가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인이 일방적으로 행동하겠다고 알리면서, 자기 자신이 불량국가로 행동하고 있는 바로 그 순간조차 그렇습니다. 불량국가인 미국은 9월 11일 공식적으로 유엔에 의해 그렇게 행동하도록, 다시 말해서 소위 ‘국제 테러리즘’에 반대해 세계 도처에서 스스로 지키기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모든 조처를 취할 수 있도록 허가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