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야?"
제복은 숙연해진 분위기를 왈칵 잡아 흔들기라도 하는 것처럼 다짜고짜, 탁 갈라진 음성으로 소리질렀다.
"아…… 아닙니다."
나는 순식간에 기가 죽었다.
"그럼 왜 일어서서 노려보는 거야?"
"저…… 사실은…… 문을 좀 열어놓았으면 해서……"
나는 고개를 푹 숙였으나 새삼 가슴이 뛰었다. 내가 버스에 태워지기 이전부터 버스의 창문이 모조리 닫혀 있었다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해낸 것이 자못 대견스러웠다.
"옳습니다. 문을 엽시다!"
생기가 도는 듯한 더벅머리의 외침이 순간 끈적끈적한 공간을 왈칵 흔들었다. 버스 속이 돌연히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권태와 무기력이 두텁게 깔려 있던 사람들의 눈빛이 새롭게 빛났다. 나는 예상하지 못했던 이 새로운 분위기에 용기를 얻어 숙였던 고개를 들어올렸다.
"지발 한번만 살려주시는 심치고 보내줘유. 어린것이 다 죽어갈틴디유. 그저 한번만……"
"정말 왜들 이렇게 말썽이야!"
빨간 원피스의 헤실대는 웃음을 마주하던 제복은 노여움으로 이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빨간 원피스가 웃음을 거두며 마악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제복의 팔을 붙들었다.
"관두세요 아저씨, 저런 여잔 내버려두면 되잖아요?"
"버려둘건 너 같은 여자야. 넌 좀 빠져 있어."
순간 빨간 원피스의 애교로 넘치는 말을 윽박지른 건 잠자듯 기대앉아 있던 더벅머리였다. 그는 증오에 찬 눈길로 빨간 원피스를 노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저 자식이 또 지랄이야."
"아부로 무장할 필요 없다. 그따위 말투가 너를 버스 밖으로 풀어놔주게 될 줄 아나?"
"너희들은 좀 가만히 있어!"
제복이 빨간 원피스의 팔을 뿌리치며 일어섰다.
이윽고 신호등이 파란 불로 바뀌어졌다.
반대쪽으로 곤두박질하던 차의 행렬이 노란 택시의 꽁무니를 마지막으로 끝나자 덜커덩하고 버스가 출발하였다. 바로 이때였다. 악착같이 달려들어 사람들의 목을 감아죄던 무더위를 뚫고 상당히 멋지다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는 움직임이 버스의 출구에서 일어났다. 아직까지 훌쩍대며 출입구 옆자리에 앉아 있던 함지박이 출발하는 버스의 문을 열어젖뜨리고 총알처럼 인도로 뛰어든 것이었다.
"오! 영광스러운 탈출이여!"
제복이 출입구로 매달린 것과 더벅머리가 손뼉을 치며 환성을 울린 것은 거의 같은 순간이었다.
"으흐흐…… 견딜 수가 없단 말야. 모두 끈끈한 유리 속에 갇혀서 허덕이고만 있어. 찰거머리처럼 온몸을 조여오는 이놈의 더위를 그럼 어쩌란 말인가. 흐흑……"
더벅머리가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두 주먹으로 버스의 창유리를 힘껏 후려쳤다. 챙그렁,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더벅머리의 손목에 피가 튀었다.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이 깨어진 창을 비집고 들어왔다.
"그렇다, 창을 열자. 이 무더위는 도저히 더 견딜 수 없다!"
누군가가 소리질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무기력을 털고 일제히 일어선 사람들 때문에 버스 속은 돌연히 수라장이 되었다. 저마다 창문만 열어놓으면 살겠다는 듯이 사람들은 창으로만 매달렸다. 순간, 삐익하는 요란한 금속성이 들리며 버스가 급정거하였다. 그 바람에 일제히 일어섰던 사람들이 서로 뒤엉켜서 나뒹굴었다.
"사람이 치었다!"
문득 경악에 가득 찬 부르짖음이 들려왔다.
"여자다! 애기도 죽었다. 저 피!"
경찰버스에 아기를 안고가던 여자가 친 모양이었다. 나는 벌떡 일어섰다. 둔탁한 것으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눈앞이 아찔해왔다. 도대체 나는 뭘 하고 있단 말인가. 아내는 거꾸로 서서 버둥대는 아기 때문에 사지가 찢겨 죽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아내는 이미 시뻘겋게 피를 뒤집어쓰고 죽었을 것이다.
나는 필사적으로 사람들이 매달려 아우성하는 출구를 향해 기어나갔다. 검은 하늘에서 마침내 굵은 빗방울이 후드득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