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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MARK/literature

흰 소가 끄는 수레 / 박범신

5

영철 어머니는 무당이었다. 나는 몸이 약해서 걸핏하면 경기로 쓰러졌고, 홍역을 치를 때는 죽은 것과 진배없는 고비를 여러번 넘겼다고 들었다. 막내로 얻은 천금 같은 외아들, 행여 염라대왕이 잡아갈까봐 어머니는 아예 영철이 어머니를 내 수양어머니 삼았다. 영철 엄니가 굿을 하는 참에 글쎄, 최영장군 귀신인가 뭣이 나와가지고 점괘를 내놓는데, 황구가 너를 해코지하러 들어온 잡귀라 그거였어. 어디서 살던 놈인지도 모르는 것이 들어와가지고 한 이태 됐던가. 식구들하고 정이 들 대로 든 다음이었지. 그래도 어쩌겠냐. 차마 잡아먹을 수는 없고, 그날 당장으로 황구를 내쫓을밖에. 그런데 세상에, 이놈이 없어져줘야 말이지. 동구 밖까지 부지깽이로 두들켜패서 쫓아도 금방 돌아와 삽짝 흔드는 데야 방도가 없는 거라. 그때 이미 늙어서 걷는 것도 신통찮고, 털도 다 빠지고, 흉물스럽긴 흉물스러웠지 뭐. 헐수할수없으니까 엄니가 동네 청년들한테 잡아먹어라 허락을 했어. 허어, 그런데 이놈이 참 영물였어. 막상 동네 청년들이 잡아먹자 뎀비니까 들판길로 내빼더니 그날부텀 흔적 없이 사라지고 안 와. 다행이다 했지. 너야 뭐, 어린것이 왜 그렇게 엄마 찾듯 그놈을 찾아쌌는지 울고불고함서 찾아쌌지만. 갑자기 가슴이 불안하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누님들도 이제 중늙은이를 모두 넘겨 하나같이 돋보기를 꺼내 쓰고서 나물을 다듬는 중이었다. 그 다음은 어떻게 됐어? 내가 물었다. 두어 달 지났던가, 하고 큰누님은 한숨을 쉬었다. 내가 널 아장아장 걸려서 밭에 가느라 동구 밖 수문까지 왔는데 아, 수문에 그놈이 돌오와 있는 거여. 수문은 왜정 때 축조한 것으로 그 높이가 지상에서 사오미터 이상 됐다. 둘째누님 셋째누님 얼굴에도 그 대목에서부터 침울한 기색이 돌았다. 생긴 건 다 죽게 생겼더라. 제대로 서 있지만 못해 자꾸 앞발을 굽히며 주저앉는 꼴이 살아봤자 열흘 안짝, 그랬을거여. 그래도 우리를 보더니 꼬리를 치고, 잔뜩 목쉰 소리로 짖는 것이 짐승이지만 목이 탁 맥히더라구. 어린 네가 그 녀석한테 달려 나가려는 걸 내가 잡았지. 널 안 잡고 그 짐승과 상봉을 시켰다간 엄니한테 맞아죽을 거니깐. 네가 내 품안에서 울고불고 버둥거리고…… 그러자, 이상한 일이 벌어졌어. 큰누님의 말을 더이상 들을 필요도 없었다. 오랫동안 시간의 부식토 밑에 가려져 있던, 썩지 않는 그 무엇, 햇빛 속으로 꺼내들어 쓱싹 닦아냈을 때처럼, 하나의 삽화가 바로 어제 경험한 것보다 훨씬 명징하게 내 눈앞에 떠올라 보이는 것이었다. 늙은 개는 쇠진할 대로 쇠진하여 아주 느리게, 쓰러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수문 꼭대기로 올라갔다. 나는 심지어 개도 자살하는 걸 보았었소. 사내가 말했다. 사멸의 공포에 대한 필사적인 저항, 아니면 음산한 빛의 잔해. 꼭대기에 올라간 늙은 개는 울부짖지도 않고 다만 한번 이편을 바라보았다. 초신성의 흰 광채가 개의 눈에서 번쩍했다. 그것이야말로 내 무의식의 어둠속 에 평생 잠복해 있으면서 시시때때, 생살을 갈가리 찢으며 퉁겨올라와 나를 혹은 쓰러뜨리고 혹은 일으켜세우던, 카미까제의, 직진강하의, 통렬한 산화를 향한, 오르가슴, 잔인한 오르가슴, 그 섬광의. 늙은 개는 단번에 수문의 콘크리트 모서리를 차고 날았다. 수천 수만의 나비떼가 날아오르는가. 개의 사지는 창공으로 비상하는 듯하다가 곧장 하강의 직선을 긋고 열 길 물속으로 쑤셔박혔다. 독한 놈이었다. 허우적거릴 것도 없이 늙은 개는 죽어서야 떠올랐다. 그 개 이름이 뭐였어, 라고 셋째누님이 묻고 있었다. 이름은 무슨 이름, 그냥 워리 하고 불렀지 뭐.

6

힌두교에선 일생을 네 주기로 나누어 산다. 젊은 날엔 학생기로 주경야독 배우고 익히며, 철이 들면 가주기로 결혼해 식솔을 위해 밤낮없이 일하고, 자식이 성년이 되면 임주기로 모든 걸 물려준 뒤, 먼 숲에 들어가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 누웠으니 대장부 살림살이 이만하면 족하도다, 자연과 더불어 살고, 죽음이 가까우면 유행기로 성지순례를 다니다가 홀로서 정갈하게 쓰러져 죽는다. 힌두의 신들은 스님들처럼 혼자 사는 법도 없다. 젖통이 완전한 반원으로 솟아오른 섹시한 마누라들을 여럿 거느린다. 고 추모를 이백여주나 심은 건 5월 13일, 첫 열매를 내가 본 것은 6월 8일. 비료와 농약도 주지 않으나 제각기 제 열매 영락없이 찾아 맺으니 일할 것도 없다. 나는 역시 절의 중도 되기 싫고 일요일마다 성당에 가기도 싫다. 종교를 가져야 한다면 힌두교도가 되고 싶다. 젖통 큰 여러 아내와 사는 힌두의 신들이 부럽다.

그래도, 여전히, 나는 자꾸 글을 쓰고 싶으니…… 눈물겹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