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로 산업화된 사회는 질병의 존재에 대한 인식론적 정당함을 유지하기 위하여 매우 위험한 도박을 하고 있다. 질병이 인간을 사로잡고 마는 그 무엇이고, 사람들이 '꽉 쥐거나' '손에 넣는' 그 무엇인 한은, 이러한 자연적 과정의 희생자는 스스로의 상태에 대하여 책임을 질 필요는 없다. 그들은 그들의 주관적 현실에 인내하는 경우의, 엉성하고 열등하고 무능한 행동 때문에 비난받기보다는 도리어 동정을 받을 수 있다. 곧 그들이 자신들의 질병을 '사물의 존재 방식'의 표현으로서 소박하게 받아들인다면 그들은 참으로 쉽고 유익한 것으로 변모되고 강도 높은 산업의 메스꺼운 정신적 압박을 증가시키는 것에 협력해왔다는 정치적 책임으로부터 면제될 수 있다. 고도 산업사회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놓여 있는 상황과 싸우는 힘을 빼앗아 버렸기 때문에 질병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사람들이 건강을 해쳤을 때 그 사회는 파괴된 '관계' 대신에 '임상적' 보철을 대체한다. 만일 의학이 사람들의 생물학적 혼란을, 그들에게 부과되었던가 또는 그들 스스로가 부과한 생존방법의 결함이라고 하기보다는 건강의 결함으로 설명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그와 같은 상황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킬 것이다. 진단이 환자에게 주는 개인으로서의 정치적 결백의 확인은 나아가 생산과 소비에 대한 종속을 정당화하는 위생적인 가면으로 제공된다.
개인의 신체에 형성된다고 생각되는 실체적인 질병의 존재를 의학적으로 진단하는 것은, 희생자를 비난하는 간교하고 비독덕적인 방법이다. 의사는 스스로 지배계급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동료가 인간이라고 하는 생체가 적응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 내는 것을 비판하는 대신, 기술화되고 전문가에 의해 관리되는 상황에 개인이 적응하지 않는다는 판단을 내린다. 이리하여 실체적인 질병은 정치적으로 편리한 신화의 구체화로 해석되고, 그 신화는 산업사회의 개인의 신체에 대한 요구에 신체가 반란할 때 개인의 신체 속에 실체를 갖는다.
어떤 사회에서도 질병의 분류-질병분류학-는 사회조직을 반영한다. 사회가 만들어 내는 질병은, 의사에 의해 세례를 받아 관료과 의미 있는 이름을 부여한다. '학습 불능', '과운동증', '미소 뇌손상'이란, 부모들에게 왜 그들의 아이들이 공부하지 않는다글 설명하는 학교의 불관용이나 무능에 대한 알리바이로 제공된다. 고혈압은 상승하는 스트레스에 대한 알리바이로, 퇴행성 질환은 퇴행하는 사회조직에 대한 알리바이로 각각 제공된다. 진단이 확실하면 확실할 만큼 치료는 귀중한 것으로 나타나고, 사람들이 진단과 치료의 쌍방을 필요로 한다고 하는 것을 납득시키는 것이 쉬워져, 사람들이 산업 성장에 반대하는 경우가 적어진다. 노동조합을 갖는 노동자는 가능한 한 가장 비용이 많이 드는 치료를 요구하나, 그것은 자신들이 세금과 보험에 투입된 돈의 얼마를 되돌려 받아, 그리고 그렇게 하여 평등이 만들어진다고 하는 잘못된 기쁨에 의하는 것일 뿐이다.
질병이 기질적인 비정상이라든가 또는 행동적 비정상으로 생각되기 이전에, 병자는 의사의 눈 속에서 자기 고뇌의 반영과 그 고뇌의 독특함의 인지를 볼 수 있었다. 그가 현재 만나는 것은 입력과 출력의 계산에 종사하는 생물학적 회계원의 응시이다. 그의 질병은 그로부터 취해져 제도적인 기업의 원재료로 변하고 말았다. 그의 상태는 그가 이해할 수 없는 언어 속의 일련의 추상적 법칙에 따라 해석된다. 그는 의사가 싸우는 무연의 실재에 관하여 가르침을 받지만, 그것은 의사가 환자의 협력을 얻는 것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범위 내에서 뿐이다. 언어는 의사에 의해 인계되고 병자는 자신의 고뇌를 나타내기 위한 의미있는 말을 박탈당한다. 그리하여 나아가 언어적 속임수에 의해 고뇌는 증대된다.
과학적 은어가 신체에 관한 언어를 지배하기 이전에 이 분야에서의 일반적인 언어의 레파토리는 풍요했다. 농민의 언어가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보물의 다수를 보존하여 왔다. 속담이나 관용어를 통하여 교훈은 언제나 이용될 수 있었다. 바빌로니아인과 그리스인에 의해 공식화된 의사에 대한 불평은 독일의 육체 노동자들에 의한 표현과 비교되어 왔다. 고대에 환자는 더듬거리며 허우적거리며, 무엇인가가 그를 '쥐었다'던가 무엇을 그가 '쥐었다'고 말했다. 반면 산업 노동자는 자신의 고통을 단조롭게 '그것'이라고만 하나 그의 선조들은 그들을 상처 입히고 찌르는 악마에 대하여 다양한 색채와 표현력을 갖는 이름들을 지녔다. 요켠대 사회적으로 인용되는 말이 점점 엘리트 전문가의 특별한 언어에 의존하는 경향이 증가됨에 따라 질병은 계급 지배의 도구가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대학교육을 받은 자와 관료는 의사가 배분하는 치료에서 의사의 동료가 되었고, 반면 노동자는 주인의 언어로 얘기하지 않는 신하로서의 위치를 부여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