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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MARK/humanities

한국 민주주의의 현실과 도전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문화 변동과 민주주의에 대한 소고



 인생을 견뎌내기 위해서는 고통을 일시적으로 완화하는 수단이 필요하다. 그런 수단으로는 세 가지가 있을 것이다. 첫째는 우리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려 고통을 가볍게 생각하도록 만드는 강력한 편향. 둘째는 고통을 줄여주는 대리만족. 셋째는 고통에 무감각하게 하는 마취제이다. 이런 고통 완화제는 반드시 필요하다.



 미디어와 대중문화산업에 대한 비판이론이나 그람시, 구조주의 기호학이나 마르크시즘적인 해석과 비판은 언제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과 비판들은 대중들이 읽어주지 않을 편지가 될 가능성이 크다. 대중들은 명백한 자본주의 문화산업 비판의 논리가 아니라 "……그런데도 고통을 완하하고, 잠시 고통을 잊을 수 있고, 무료함을 달래고, 흥분을 지속시키며, 마취당할 수 있는" 그 무엇에 대한 편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대중들은 도덕적 보수주의자들의 미디어와 대중문화 비판의 목소리에도, 문화산업을 벗어난 진정한 문화를 주장하는 좌파의 자본주의 문화 비판 언어에도 선뜻 동의하거나 동참하지 않는다. 대중들은 이상주의보다는 현실적 감각주의를 선택했고, 이 현실적 감각주의는 현대 자본주의 미디어와 대중문화산업의 공통 감각이다. 바로 이것이 자본주의의 문화 논리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기틀린은 정보사회나 정보시대와 같은 확신에 찬 선언적 표현이 은폐하고 있는 진실을 말한다. 그에 따르면 현대 사회의 미디어의 본질은 정보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재미, 안락, 편리, 즐거움 등으로 불리는 것들의 근거이자 통로라는 것이다. 따라서 유망한 미디어와 문화산업은 정보가 아니라 만족을 주는 사업이다. 집과 거리 혹은 직장과 차 그 어디에서든 엄청난 시간을 투자하면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미디어 생산물을 통해 어떤 감각적 만족을 얻는 것, 즉 시트콤의 농담에서 웃음을, 속옷광고에서 성적인 흥분을, 라디오 선곡에서는 신선한 음악을, 비디오게임의 놀라운 속도에서 실제 움직이는 듯한 감각을 추구하며 때로는 그것을 실제로 느낀다는 것이다. 이것이 '지금, 그리고 현재의' 미디어와 대중문화산업의 본질인 것이다. 따라서 미디어와 대중문화산업에 대한 불만스러운 시선은 다음 지점으로 이동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모든 미디어의 악덕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미디어와 (대중문화산업이) 없다면 우리가 굳이 느끼지 않아도 되는 감정을 미디어가 급류처럼 쏟아 부으며 우리의 삶을 불필요한 포화 상태로 몰고 간다는 것이다"라는 기틀린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 속에서 이 같은 미디어와 대중운화를 어떻게 다루고 처리할 것인가? (…) 여기에 해답을 찾을 수 있을 실마리가 있다. "만화책과 사진 소설, 시트콤 등과 같이 산업화된 픽션들의 생산·유통을 반대한다는 소식을 들은 칠레의 슬럼 거주자가 그에게 간청했던 것은 "제발, 내 꿈을 빼앗지 말아요'". 그렇다. 사람들은 좀 더 안락하고 편할 뿐만 아니라 수없이 다양한 감각과 취향을 생산하는 미디어와 대중문화산업을 선호하고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미디어와 대중문화가 제공하는 신화와 이데올로기는 대중들에게 꿈일 수도, 희망일 수 있고, 삶의 동력일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우리는 그 꿈, 그 희망, 그 삶의 동력을 용인하고 인정해야 하는가 아니면 부정하고 이 자리에 새로운 꿈, 희망, 삶의 동력을 가져와야 할 것인가? 만약 우리가 그것을 가져와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 이유은 무엇인가?

 명백한 하나의 사실은 우리가 지금 미디어와 대중문화오락산업의 급류 속고에서 견유주의적 문화를 환영하고 용인하고 있다는 것이다. 거리에 나와 방귀를 뀌고 똥을 누고 오줌을 싸고, 사람들이 붐비는 대로에서 자위행위를 하고, 명성을 경멸하고 건축물에 입을 삐죽거리며 경의를 표하지 않고 신과 영웅의 역사를 패러디하고 날고기와 야채를 먹고, 태양 아래 누워 창녀들과 시시덕거리며 대왕에게 햇빛을 가리니 비켜달라고 말한 다오게네스 식의 견유주의 문화 말이다. 미디어와 대중문화오락산업은 이 견유주의 문화로의 유혹을 통해 이상주의와 권위에 도전한다. 미디어와 대중문화오락산업 영역에서 점증하는 미용, 포르노그래피, 소비자 중심주의, 환상, 중독과 매춘 등의 혼합된 묘한 분위기는 자본주의의 보편적 장식품이 되는 반면, 죽고 쓸모없으며 소외된 모든 것은 비웃는 형태로 남의 시선을 끌고 있다.

 문제는 이 견유주의 문화가 거대한 공·민영 미디어와 대중문화오락산업 세계에 의해 관리되는 문화라는 것이다. 즉 사람들의 견유주의적 놀이터가 결코 될 수 없다는 것이다. (…) 동시에 이 관리하는 문화 체계는 언제든지 특정한 감각과 문화, 관념과 가치를 통제하고 축출하는 나이트클럽과 같은 곳이다. 또한 사람들은 미디어와 대중문화오락산업이 자신들에게 제공하는 불쾌함과 분노, 좌절감을 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들을' 알면서도 그 미디어와 대중문화오락산업에 의존한다. 대중들은 계몽적 냉소주의에 빠져 있다. 호르크하이머의 생각을 조금만 변형시켜본다면, 대중들은 좀 더 나은 교육을 받고, 더 많은 정보를 보유하게 되었으며, 훨씬 덜 순진하다. 또 대중들은 국제 관계를 상세하게 알고 있으며 정치 운동의 속임수도 알고 있다. 하지만 대중들은 규칙 자체를 문제 삼지 않는다. 또 이 규칙을 변화시키려는 생각 자체를 포기한다. 대중들은 미디어와 대중문화오락의 허위의식의 주체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무력한 자신들을 보존하는 방식으로 냉소주의를 선택한 것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무력한 대중들의 냉소주의는 미디어와 대중문화오락산업, 대중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견유주의적 문화의 또 다른 이름이다.

 따라서 미디어와 대중문화오락 영역을 둘러싼 투쟁은 그 내부의 문제라기보다는 외부의 문제이다. 즉 대중이 더는 이성적 가치를 믿지 않는 것, 자의적인 권력 체계과 사회적 관계 및 과정과 같은 관리와 계획, 기획과 조작의 합리성이 지닌 물신성의 확대와 이를 통한 공학의 심화, 인간의 통제 외부에 존재하는 자본, 이에 대한 공적 통제력을 확보하지 못하는 것에서 쌓여가는 현실적 무력감들이 이 냉소주의와 견유주의의 미디어와 대중문화산업의 물질적 토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