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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MARK/humanities

한국전쟁의 기원/브루스 커밍스

 해방이 된 지 몇 주 내에 한국에는 정치적 질서를 위한 전제조건 자체가 없었음이 드러났다. 정치적 엘리트들 사이에는 소유의 방식 및 기초자원의 분배, 적절한 사회형태, 생활기회의 배분 및 정치적 분규를 다루는 기본 법규 등의 기본적 문제에 관하여 엄청난 견해 차이가 있었다. 이로부터 수개월 사이에 이 문제들―실제로는 전후 한국의 적절한 지배형태 자체에 관한 분규―이 진전됨에 따라서, 한국은 정치적 문제뿐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 양분되고 말았다. 정치는 곧 가두의 싸움으로 전개되었다. 밀즈가 정치권력이란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머리를 갈기는 것이라고 언급한 그런 최후 대결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1945년의 한국민주당은 지지기반의 구성 및 확대에 관하여 전혀 아는 바가 없는 사회적 명사들이 모인 집단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지방조직을 거의 완전히 무시하면서 서울에 노력을 집중하였다. 그들이 지방에 주의를 돌렸을 때는 그 목표가 대중적 농촌기반을 건립하려는 것이 아니라, 지방관리들, 군수들 및 현지의 경찰을 포섭하는 데 있었을 따름이다. 이 사람들은 대중을 두려워했다. 그들은 인간적으로는 그렇지 않을지라도 그들의 정치는 조선 말기와의 연계를 연상케 했다. 1940년대의 노년층은 1890년대의 기교를 흉내냈다. 홉스바움은 영국의 엘리트가 새 병에 낡은 상표를 붙이는 취향이 있다고 서술한 바 있다. "깊이 변화된 내용에 낡은 제도의 형태를 계속 부여한다"는 것이었다. 한국의 늙은 세대에 있어서는 이것이 정반대였다. 그들은 내용을 유지하면서 형식만을 변형시키려는 경향을 가졌다. 즉 국가관료를 이용하여 계급적 특권을 유지한 채 조선의 옛 노선을 유지하면서 이것을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1940년대의 차이는 일본이 옛 조선의 것보다 훨씬 강력한 국가체제를 유산으로 남겼다는 점이다.
 미군이 1945년에 한국에 진주했을 때 그들은 한 구석에서 은밀히 쑥덕거리는 활동을 발견했다. 지방이나 대중적 기반이 없는 소수 개인들의 집단이 모여서 희미하게 민주주의를 중얼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한인 주권의 모습으로 자처하면서 시골까지 깊숙이 침투해 있다는 사실로써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혁명적 조직들을 발견했다. 그들 혁명가들은 일본에 항거했다는 권위의 기초 위에서 자신들의 통치권을 주장하였다. 밤면 보수집단들은 전통에 자신들의 정당성의 기초를 두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과거에도 통치했으니 앞으로도 계속 통치하겠다는 것이었다―다시 말해, 만약 미국인들이 그렇게 하도록 시킨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