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OOKMARK/humanities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아르놀트 하우저

 정면성의 원리
 고대 오리엔트의 예술, 그중에도 특히 이집트 예술에서 보이는 모든 합리주의적 형식원리 가운데 가장 뚜렷하고 가장 특징적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정면성;(Frontalitat)의 원리다. 여기서 말하는 '정면성'의 원리란 랑에 및 에르만이 발견한 인체묘사의 법칙으로서, 이 법칙에 따르면 인체는 그것이 어떠한 자세를 취하고 있듯간에 가슴의 표면만은 그 전부가 감상자 쪽을 향하도록 묘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상체는 하나의 수직선에 의하여 서로 똑같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게 된다. 축을 중심으로 놓고 인체의 정면 중에 제일 폭이 넓은 부분을 전면에 부각시키려고 하는 이 태도는 대상에 구비되어 있는 갖가지 요소에 대한 일체의 오해나 혼란 또는 은폐를 방지하기 위하여 될 수 있는 대로 명확하고 간소한 인상을 제시하려는 의도를 분명히 보여준다. 정면성의 원리가 발생한 것은 아직 화법이 유치했기 때문이라고 하는 설도 어느정도까지는 성립할지 모르나. 그와같은 기술적 제약에 의하여 예술가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그린다는 것이 이미 있을 수 없는 일이 되었던 시대에까지도 이 묘사법이 고수되었다는 것을 보면 이 원리가 지켜졌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별도의 해석을 내릴 필요가 있다.
 정면성의 원리에 따라 인체를 묘사할 경우 상체가 정면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은 감상자와의 어떤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관계를 표현하는 것이다. 감상자라는 존재를 아예 예상조차 하지 않았던 구석기시대 예술의 경우에는 정면성의 원리라는 것은 없었다. 구석기시대 예술이 자연주의적이었다는 것은 감상자는 존재 따위를 처음부터 무시하고 나섰다는 사실의 또다른 표현이다. 이와 달리 고대 오리엔트의 예술은 감상자에게 직접 호소하고자 한다. 그것은 권위를 상징하는 예술이며 존경을 강요하는 예술인 동시에 존경을 아끼지 않는 예술이기도 했다. 감ㅅ아자를 의식하는 그런 태도는 일조의 존경을 표현하는 행위이며 예의이고 범절이었다. 왕의 이름을 드높이고 그 덕을 칭송하고자 했던 궁정예술은 모두가 어떤 원리에서든 정면성의 원리를 내표하고 있다. 감상자 또는 발주자에게 위안과 봉사를 제공할 의무를 지니고 대면하는 예술인 것이다. 이 경우 감상자 혹은 발주자는 예술에 정통한 사람들로서 비속한 환각기법을 사용할 여지는 없게 된다. 이 태도는 후대의 고전적 궁정희곡에도 여전히 뚜렷한 흔적을 남기고 있는데, 여기서는 배우가 무대 위의 환각을 만들어내기 위한 조건 따위에는 일체 눈을 돌리지 않고 직접 관객을 향해 말을 한다. 말하자면 모든 말과 동작은 직접 관객을 목표로 하는 것이요, 관객에게 '등을 돌리는' 것을 피할 뿐 아니라 온갖 수단을 다 써서 지금 여기서 자기가 보여주는 것이 하나의 픽션이고 협정된 유희규칙에 따라 이루어지는 기분전환에 지나지 않음을 강조한다. '정면성'의 원리에 입각한 이 예술은 자연주의적 희곡이라는 과도기 단계를 거쳐 그 정반대의 극인 '영화'로 진전해나간다. 그리하여 영화는 관객 앞에서 사건을 전개해가는 것과는 반대로 관객을 사건 속에 끌어들임으로써 관객에게도 능동적인 역할을 시키는 동시에 사건을 취사선택한 것은 전혀 우연이고 등장인물들도 전혀 뜻밖에 현장을 발각당했다는 듯이 그려나가고 하기 때문에, 희곡에서 볼 수 있는 허구나 인습을 최소한도로 줄이고 있다. 그 노골적인 환각주의와 거리낌없이 직접 관객의 피부에 호소하고 관객을 마음대로 자기 손아귀에 넣어 휘두르려는 경향을 지닌 영화예술은 모든 세계관적인 차이를 뭉개버리려고 하는 자유주의적·반권위주의적 사회질서가 낳은 민주주의적 예술관의 단적인 표현이다. 반면 궁정예술이나 귀족예술은 무대의 틀, 무대조명, 단상의 높이 등이 강조되는 점에서도 이미 알 수 있듯이 철저히 인위적이고 주문에 응하여 만들어진 예술이요, 그 발주자는 환각 따위가 전혀 먹혀들지 않을 정도로 그 분야에 정통한 전문가라는 전제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비 극
 비극이야말로 아테네 민주제의 특색을 가장 선명하게 나타내고 있는 예술이다. 아테네 민주제의 사회구조가 내포하고 있는 갖가지 모순을 이만큼 직접적이고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는 예술장르는 없을 것이다. 비극은 그 외면적인 형식에서는, 즉 일반대중을 위해 공연되었다는 점에서는 민주적이지만, 그 내용에서는, 즉 소재가 된 영웅전설이나 영웅적·비극적 생활감정이라는 점에서는 귀족적이었다. 상류사회의 연회석에서 음송될 목적으로 만들어진 영웅시나 서사시에 비하더라도 비극은 처음부터 좀더 넓고 다양한 관중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철저히 귀족적인 깔로까가티아의 화신인 위대한 개인, 평균 이상의 고귀한 인간을 기준으로 삼고 있었다. 그리스 비극은 원래 합창대 지휘자와 합창대 사이의 문답에서 생겼고 합창이라는 집단적 형식이 희곡이라는 대화형식으로 이행하는 데서 생겨난만큼 본질적으로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것이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강한 공동체 감정이 전제되고 비교적 넓은 사회층 사이에 평준화가 진행되어 있어야 하며 진정한 의미에서의 비극이란 집단체험으로서밖에는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비극은 물론 아직 선택된 관객을 대상으로 하고 그 범위는 고작해야 도시국가의 자유시민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관객의 구성이 정치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계층보다 특별히 더 민주적이었다고는 할 수 없다. 더구나 공설극장의 운영방법에 이르러서는 관객의 구성보다도 더욱 비민중적이었다. 이미 어느 정도 선정된 일반 관객조차도 공연될 작품의 선택이나 각종 상의 수여에 대해서는 아무런 결정권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연작품을 선정하는 권한은 모두 공연준비를 책임지고 있던 부유한 시민들에게 있었고, 수상작의 결정은 시 참사회의 집행기관에 지나지 않으며 판단을 내리는 데 무엇보다도 정치적 배려를 우선시하는 심사위원들의 손에 달려 있었다. 일반 시민은 입장료를 지불할 필요도 없는데다 도리어 극장에서 보낸 시간에 대하여 보상금까지 받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 흔히 민주주의의 최고의 승리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칭송받기도 하나, 실은 이것이야말로 일반 민중이 연극의 운명에 대해 발언할 길을 처음부터 막아버린 요인이었다. 입장료 형식으로 지불되는 소단위의 금액들에 의존하는 극장만이 진정한 의미의 '민중극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테네의 극장은 민중극장의 원형이었고 당시의 관중이야말로 전국민들을 한덩어리로 하는 예술공동체의 이상이라고 보는 후대의 고전주의자나 낭만주의자들의 사고방식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제 시대 안테네의 축제극장은 결코 민중극장이 아니었다. 고전주의자는 낭만주의자들이 그렇게 생각한 것은 극장은 무엇보다도 먼저 일종의 교양기관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미무스
 고대 그리스·로마에서 진정한 의미의 민중연극은 미무스(mimus, mime)였다. 미무스는 국가로부터 아무런 지원금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상부의 어떤 지시에도 따를 필요가 없었고 민중과의 접촉에서 얻은 스스로의 직접적인 체험에만 의존하면서 자유로운 활동을 하고 있었다. 미무스가 구경꾼에게 보여준 것은 비극적·영웅적·귀족적인 숭고한 풍습을 내용으로 한 훌륭한 구성의 희곡들이 아니고 지극히 비근한 일상생활에서 가져온 주제와 인물을 토대로 자연주의적 수법으로 그린 짧은 스케치풍의 장면들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마침내 민중을 위해 만들어졌을 뿐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민중의 손으로 만들어진 예술을 대하게 된다. 미무스의 출연자들은 직업적인 배우였다 하더라도 끝까지 민중배우로 남았으며, 적어도 미무스가 상류사회에서도 유힝하게 되기까지 엘리트 교양집단과는 전혀 접촉을 갖지 않았다. 그들은 서민출신으로 서민과 같은 취미를 가지고, 서민새활의 슬기를 바탕으로 작품을 만들었다. 그들은 관중을 훈계하거나 교육시키려하지 않았고 단지 관중을 즐겁게 하고자 했을 뿐이다. 이렇게 욕심 없고 자연주의적이며 민중적인 연극은 고전적 작품만을 상영한 공설극장에 비하면 훨씬 길고 연속적인 역사를 가졌고 공연품목도 훨씬 풍부하고 다채로웠는데, 다만 그 작품들은 오늘날 거의 완전히 없어지고 말았다. (…)비극은 원래 그 자체로서는 비희곡적인 형식인 디티람부스에서 생겼는데 그것이 희곡의 모습을 취하게 된 것은, 즉 묘사자가 줄거리 속의 가공의 인물로 변하고 서사적인 과거형이 형재형으로 옮겨진 것은 미무스의 영향을 받은 탓이었다고 보아 무방할 것이다. 여하튼 그리스 비극에서는 희곡적인 요소가 서적정·교훈적인 요소의 그늘에 숨어 있다. 비극무대 위에 합창대가 존속할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비극이 희곡적인 것만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관객을 즐겁게 하는 것 이외의 다른 목적에도 봉사하지 않으면 안되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